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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2020-06-13

자연이 우리를 위로하는 방법, <야생의 위로>



괴테와 더불어 독일 고전주의의 2대 문호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는 “자연은 무한히 나누어진 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야생의 위로>(심심 펴냄)는 반평생 우울증과 싸운 에마 미첼Emma Mitchell이 자연을 거닐고 야생의 순간을 포착하며 마음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어쩌면 신은 녹음 속에 스며들어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꽃이 아름답게 피었네..."

오랫만의 숲 속 산책길, 이런 말을 하고 나서는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나여... 어떤 꽃이 어떻게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충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생각의 빈곤함과 무지함이란.


도시에서 태어나 아스팔트 길만 밟고 다녔고, 나무나 꽃이라고는 아파트에 피는 몇 가지 꽃과 나무가 전부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위로를 해보지만 늘 막연히 아쉽던 부분이었다. 정확한 이름과 습성을 안다면, 언제 어떻게 피고 지고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다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훨씬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느껴질 텐데. 영국의 박물학자이자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인 에마 미첼의 <야생의 위로>는 그런 생각에서 골라든 책이었다.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어느 나라보다 더 낯설게 느껴지는 자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서 말이다.






"6월쯤에는 한 해의 흐름이 조금만 느려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져서 잔디가 누렇게 바래고 한 해가 가을을 향해 반전되기 전에 생장의 계절을 길게 늘여 온갖 푸르른 풍요로움을 좀 더 편안히 흡수하고 싶다. 나는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어진다."


과학자의 눈과 시인의 마음을 갖춘 작가는 매달 조금씩 달라지는 계절과 생명의 변화를 아름답다 못해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그 이야기가 더 강렬하게 와 닿는 것은 저자가 25년 동안 우울증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가장 큰 문제는 우울함 그 자체보다 자기혐오와 자기비판을 동반하고 이로 인해 무기력과 좌절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매일 극단적인 충동과 싸우며 자신을 조절하고 억제해야 하는 에마 미첼은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에 하나하나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만의 회복 의식을 이어간다.







그냥 걷기만 하는 것이라면, 치유와 위로가 되는 데 부족했을 것이다. 채집하고 발견한 것들을 죽 늘어놓고 감상하는 행동을 '놀링(knolling)'이라 부른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선택한 물품들을 진열하며 자그마한 임시 박물관을 조성한다. 그 과정은 위안을 주고 우울을 거둬갈 뿐 아니라 이 사물을 찾아낼 때 느꼈던 만족감을 준다." 동물과 식물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박물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그는 산책을 다니다 발견한 것들, 이를 테면 들장미 열매, 버들강아지, 솔방울, 올빼미 깃털, 삿갓조개 껍질 등을 유심히 살피고 잘 챙겨와 가지런히 늘어 놓는다. 그 사소한 행위가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책장 속을 통해 나 역시 공감할 수 있었다.







숲길을 걸을 때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가 감소되고 맥박도 차분해지고, 피부와 망막이 햇빛의 자극을 받으면 신경세포 간 신호를 전달하는 화합물인 세로토닌의 분비가 활발해지며 편한 상태로 몸을 움직이면 혈류 내 엔드로핀이 분비된다는 것을 많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증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이야기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숲이건 바다건 강가건 그 어디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 걷고 움직이는 일을 하고 난 후의 기분 좋은 자극과 고단함을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경험하지 않았던가.





언제 봄이 왔지? 언제 여름이 다 가버렸지? 어느새 단풍이 들었고 어느새 첫눈이 내린 거지? 세상에서 가장 럭셔리하게 사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맛보는 사람이다. 매일매일 미묘하게 달라지는 기온과 바람의 방향과 낮과 밤의 길이를 느껴본 일이 요즘 있었을까. 한자로 바쁠 망(忙)을 살펴보면 마음이 죽어버렸다는 의미가 된다. 바쁘다는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나는, 결국 쓸데없는 일 때문에 바쁜 것이었다. 나를 둘러싼 자연이 말을 걸어오는 지도 모를 만큼 말이다.






"어딘가로 갈 때 두 발 이외의 무언가를 이용한다면 속도가 너무 빨라질 것이며, 길가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천 가지의 미묘한 기쁨을 놓치게 되리라."


1920년대 작가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의 소설 속 한 구절을 인용하며 작가가 전한 이야기다. 그래서 엠마 미첼이 알려준 대로 천천히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려고 한다. 꽃과 나무, 새와 곤충의 이름을 공부하고 자연 속에서 미묘한 기쁨을 찾아보려 한다.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고 여유롭게 세상을 관찰하는 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호사'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테니까.






이미지 제공 도서출판 심심





김은령 <럭셔리> 편집장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디자인하우스의 라이프스타일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 기자 및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럭셔리> 편집장 겸 매거진 본부 본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밥보다 책> <Luxury Is> <비즈라이팅> 등이 있으며 <침묵의 봄> <설득의 심리학> <패스트푸드의 제국> <경영과 역사> <나이드는 것의 미덕> 등 30 여 권을 번역했다. 남편과 함께 라이프스타일 사이트 HER Report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