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문의031-645-9191

에덴 미디어

컬처
2025-06-22

겸재의 그림 속을 걷다

겸재의 그림 속을 걷다 : 호암미술관의 [겸재 정선] 전시회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로 조선을 새롭게 그려낸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그는 당시 중국의 관념산수를 답습하던 화단의 흐름에서 벗어나 조선의 산천을 자신만의 화풍과 예술관으로 그려냈으며, 직접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며, 붓을 들어 삶의 모든 결을 그려낸 예술가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들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한 시대의 정신과 미감을 담아냈고, 이번 전시회에서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 머물고 있는 시간과 숨결을 함께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호암미술관의 겸재 정선 전시회 공식 포스터


호암미술관과 간송미술관이 함께 기획한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1층과 2층의 두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각각 1부 ‘진경에 거닐다’, 2부 ‘문인 화가의 이상’이라는 주제로 펼쳐졌습니다.


1부 ‘진경에 거닐다’에서는 정선이 직접 산천을 유람하며 그린 금강산을 비롯 한양, 개성, 동해안 등 조선의 명승지를 담은 진경산수화들이 전시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상적 산수에서 실제의 산수로 나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들은 진경산수화의 시작과 변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2부 ‘문인 화가의 이상’에서는 인물화, 화조화, 영모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화가 정선만이 아닌, 문인으로서의 자의식과 당대 지식인의 품격, 그리고 집안에 대한 자부심까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해악전신첩 중 [금강내산], 1747년


이번 전시는 국보 2점과 보물 57점을 포함한 총 165점의 작품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호암미술관을 비롯해 간송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등 18개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귀중한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그야말로 정선의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압도적인 기획으로 대표작인 금강산 그림부터 서울 한강 일대의 풍경, 고사인물화, 노송과 노백처럼 상징적인 그림까지 80세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전 생애가 촘촘히 펼쳐진 전시였습니다. 


금강산을 그리다


1부는 겸재 정선이 평생 네 차례 유람하며 그렸던 금강산을 주제로 한 진경산수화를 중심으로 꾸려졌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금강전도]는 물론 해금강과 장안사, 만폭동, 삼일포 등 금강산의 각 명소들이 다양한 구도와 시점으로 그려진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중 가장 최고봉인 비로봉을 그린 그림 두 작품


금강산 관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백천교]


이 그림들은 마치 보는 이의 몸과 마음을 그 풍경 안으로 데려가는 듯한 몰입감을 줍니다. 한 폭의 그림마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일만이천봉의 거대한 스펙터클, 뿜어져 나오는 폭포의 굉음, 솟구치는 기암괴석들 속에 숨은 작은 사찰 하나, 작은 사람 하나까지—이 그림들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산세는 구름과 안개 사이를 누비며 시선을 천천히 위로 이끕니다. 봉우리 너머의 소리는 멀리 떨어진 폭포로 이어지는 듯하고, 안개는 나뭇잎에 맺힌 이슬처럼 가볍게 내려앉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 웅장한 산수 사이사이에 자리한 개미처럼 작은 인물들입니다.


가마를 타고 금강산을 유람한 양반들이 나귀로 갈아타고 돌아가는 환승 구역이었다는 [백천교]를 보면 갓을 쓴 양반, 나귀를 몰고 온 하인들이 보이고 금강산의 가이드 역할을 했다는 근처 절의 스님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짙은 소나무 향이 코끝을 맴도는 듯합니다. 작은 인물들이 마치 내가 된 듯한 느낌, 웅장한 산세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1740년대 가을철 내금강산을 그린 [풍악내산총람도]


아주 작게 표현된 정선의 그림 속 인물들 


정선의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되는 이러한 작은 인물들은 모두 표정과 동작이 살아 있어서 자연스레 관람자의 시선을 가까이 끌어당깁니다. 마치 독일제 로트링의 가장 얇은 펜으로 그린 듯, 극도로 정교하고 미세한 붓 선으로 묘사된 인물들은 화면 속에서 일상을 살 듯 대화하고, 움직이며 살아 있는 것만 같습니다.


조선의 풍경을 그리다


금강산을 그린 그림 외에도 정선의 다양한 진경산수화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은 조선 후기 한양과 그 주변(경교, 京郊)의 아름다운 명승지를 그린 그림첩으로 강변, 정자, 산과 들 등 풍경이 다양하게 담겨 있습니다. 노들섬, 양화진, 한강변 소나무 아래 앉은 시인과 화가의 모습은 그 시절 조선의 일상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압구정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던 곳 중 하나는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현재의 압구정을 그린 그림 앞이었습니다. 금강산처럼 가볼 수 없는 곳이 아닌 익숙한 장소이기에 그림이 더 신기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 "이 자리가 바로 지금 현재의 구현대 아파트 11동 자리"라고 알려주자 모두 웃으며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백 년 전의 풍경이 오늘의 지명과 만날 때 전시는 비로소 시간 여행이 됩니다. 전시 내내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왔습니다. 유럽의 어느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 못지않은 우리가 사는 땅, 우리의 조상, 우리의 자연이 담긴 이 그림들을 보며 느끼는 감동은 그 자체로 자랑스러운, 가슴 벅찬 경험이었습니다. 


정선의 초충도에서 만나는 동물들

정선의 그림 중에는 동물을 세밀하게 그린 작품들도 소개되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이 작품들 역시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오이밭에서 나오다 가시에 오이를 짊어진 고슴도치와 솔방울을 물고 사라지는 다람쥐와 개구리는 장난스런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방아깨비 다리의 작은 솜털까지 표현해낸 솜씨는 마치 현미경으로 본 듯 세밀했습니다. 어쩌면 정선이 어린 시절 인왕산 근처에서 뛰놀며 자연과 곤충을 가까이서 관찰했던 기억이 그의 화폭에 자연스레 녹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익숙한 그림 : 천 원 지폐 속의 겸재


알고 계신 분도 많으시겠지만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천 원 지폐 뒤에 그려진 그림, 바로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입니다. 도산서원이 건립되기 전, 이황이 도산서당의 완락제에 앉아 있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역대 고미술 경매 역사상 최고가인 34억에 낙찰된 그림입니다. 



전시회에서 만날 수 있는 계상정거도와 지폐 속에 담긴 모습

이 그림은 제목 그대로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고요히 지낸다'는 뜻처럼 평안해 보이는 풍경입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으로 둘러진 가운데 자리한 작은 서당이 보입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여백이 어우러진 정선의 대표적인 *은일화로 우리는 매일 그의 그림을 손에 쥐고 살았지만 정작 그 그림의 숨결과 철학을 직접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은일화(隱逸畵) : ‘은자(隱者)’ 또는 ‘은거(隱居)’의 삶을 주제로 한 그림. 즉,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선비, 은사(隱士)의 삶을 그린 회화

계속 되는 감동

'정선'이라는 이름 속에는 자연을 향한 애정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꾸밈없는 태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천천히 걷듯 그 멋진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개미만큼 작은 사람들, 내가 그중의 한 사람이 왜 지금까지 그의 그림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끄는지 분명 알게 될 것입니다.

호암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곧 막을 내리지만 겸재 정선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간송미술관에서는 그의 또 다른 대규모 전시가 열릴 예정입니다. 이번 전시를 놓쳤더라도 이어질 간송미술관 전시에서는 그의 그림을 꼭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굿 메신져

에덴가족에게 도움과 기쁨이 되는 소식을 전하는 매 순간 보람을 느낍니다. 행복을 전하는 굿 메신저입니다. 에덴낙원 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펼쳐지는 전시회와 숨겨진 이야기들, 아름다운 에덴의 모습 그리고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익한 정보들을 모아 소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