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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에세이
2020-06-04

안녕하세요



우리는 흔히 죽음을 떠올릴 때 이별부터 생각한다. 하지만 (삶이 그러하듯) 죽음 또한 새로운 관계의 매개가 될 수 있다. ‘안녕하세요’는 이 미세한 순간을 포착한 박세회 작가의 초단편소설이다. 작품 속 어머니를 일찍 여읜 나(기정)는 아버지를 보낸 자리에서 가족, 관계의 확장을 경험한다.



네비게이션을 켜고 찾아간 장례식장은 내가 중고등 학생 때 매일 버스로 등하교를 하며 다니던 그 국도변에 있었다. 6년 동안 다니던 그 길에 장례식장이 있다는 걸 아빠가 죽고서야 알았다. 사인은 급성심근경색. 팽정읍에서 제일 환자 많은 내과 원장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떠나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인구 2만의 작은 읍이라고는 하지만, 팽정의 평균 나이는 57세다. 한 달에 한 번씩 내과를 꼬박꼬박 찾는 장년들이 우글우글한 이 땅에서 혈관의 왕으로 살던 아빠가 이렇게 가서야 되겠느냐 말이다. 고지혈증약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은 동네 할머니를 앞에 두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경황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최 간호사가 있어 다행이었다.


“기정아, 아무래도 고기랑 육개장을 하나씩 더 주문해야겠다.”


장례식장을 진두지휘하며 문상객 맞이를 도와주던 최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아빠에게 자식은 나 하나뿐이었지만, 아빠를 보내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회원들의 평균 연령이 65세인 평택시의사회에서 예순을 갓 넘긴 아빠는 ‘한창 뛸 나이’였다. 작년에는 “부회장이 됐더니 돈만 나간다”며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시 의사회 부회장의 부음 소식에 김내과, 이내과, 박내과의 원장인 김선생, 이선생, 박선생은 물론이고 이들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까지 잔뜩 몰려왔다. 아빠는 의사회 야유회가 있을 때면 나를 데리고 가곤 했다. 엄마 없는 나를 쉬는 날 집에 혼자 둘 수가 없어서였다. 그때마다 내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씩을 찔러주던 아저씨들이 지금은 우리 아빠의 부의금을 내고 있다고 경황을 정리하자 시원한 물줄기가 가슴 안쪽을 씻어내고 흘러 빠져나가는 듯했다. 눈물이 흐르는 와중에도 아저씨들의 벗겨진 이마가, 하얗게 센 머리가 반가웠다.


아빠의 병원에는 대기실이랄 것도 없고 접수처랄 것도 없었다. 아니, 있긴 했지만 아무도 접수나 대기를 하지 않았다. 할매, 할배들은 병원에 들어서면 곧장 진료실 문을 열고 진료 중인 아빠의 건너편에 놓인 교회 의자에 앉았다. 말만 교회 의자인 게 아니라 뒤편에 ‘팽정교회’라 인장이 찍힌 진짜 빈티지 교회 의자였다. 할매, 할배들은 그 의자에 앉아 아빠가 다른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간혹 “살을 빼야 돼”, “아냐, 나이 들면 살 빠지는 게 더 위험해” 따위의 관전평을 늘어놨다. 아빠가 처방전을 뽑아 주면, 바로 옆에 있는 커튼 안쪽에서 최 간호사가 주사를 놓았다. 서울의 개원의가 보면 난민 진료소라고 여길 풍경이었지만, 단골 환자들은 언제나 아빠의 병원을 찾았다. 병원은 일종의 또래 놀이터였다.


장지에서 병원으로 돌아와 상복을 반납했다. 상복이라고는 하지만, 조금 뻣뻣한 검은 정장일 뿐이었다. 탈상한 셈이다.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아빠의 집으로 향했다. 일 년여 만에 들어선 그 집에선 비릿한 풀냄새가 옅게 풍겼다. 도배를 새로 한 모양이었다. 하얀 벽지 탓인지 거실이 황량할 만치 넓어 보였다. 못 보던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거실에 있는 이인용 좌식 소파 한 조가 그랬다. 낮은 원목 다리가 달린 소파는 앉는 면이 살짝 위로 향해 있었다. 자개 상판이 달린 장상에 소파 앞에 놓여 있었다. 좌식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기에 딱 알맞은 높이였다. 저게 그 장상이구나. 아빠를 처음 발견한 건 최 간호사였다.


“전화를 드려도 안 받으시길래.”


최 간호사는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아빠가 거실 장상 위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고 말했다. 낯선 좌식 소파에 앉아 아빠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혹시 바꾸었을까? 알파벳 ‘엔’(N)자, 오래전 내가 설정해 준 그 패턴을 그려보았다. 오래된 갤럭시 폰이 버벅거리며 배경화면이 띄웠다. 레이밴 선글라스에 선캡을 쓴 최 간호사와 최 간호사의 어깨를 감싸 안은 아빠가 활짝 웃고 있었다. 페이스북 아이콘을 눌렀다. 송탄의 영빈루에서 두 사람은 짬뽕을 시켜두고 셀카를 찍었다. 경주 명활산성 뚝방길에서, 해남 녹우단 뒷산의 비자림에서, 순천의 낙안읍성 앞 대폿집에서 둘은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이 다닌 곳엔 내가 아는 풍경이 많았다. “젊어진 것 같아 부러우이”라는 댓글은 김 원장이 달았고, “다음번 모임에 꼭 같이 오시라”는 댓글은 박 원장이 달았다. 나는 한참 아빠의 포스팅을 내리다가 장상의 자개 무늬를 만졌다. 최 간호사의 이름을 내 휴대전화에서 찾아봤다. 연락처에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스크롤을 올려 나흘 전 아빠의 부음을 알린 그녀의 번호를 찾았다. 나는 아직 숫자로만 적힌 그 연락처에 “안녕하세요”라고 적었다. 나의 이름을 적고 “여러모로 감사합니다”라고 적어 보내고 그녀의 이름을 저장했다.


*이글은 픽션입니다.

박세회 소설가, <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소설가. 2019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