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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배운 지혜의 유산
⑱ 유월절의 그림자: 전쟁과 고립 속 노인들의 명절
유월절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 중 하나로, 가족과 친지가 함께 모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는 때입니다. 첫날 밤 열리는 세데르(סדר) 만찬에서는 출애굽 이야기를 함께 읽고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처럼 대가족이 둘러앉아 풍성한 만찬과 담소를 나누는 명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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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데르(Seder)는 히브리어로 '질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유월절 만찬은 총 15단계의 순서를 따라 진행됩니다. 무교병(마짜), 쓴 나물(마로르), 구운 뼈(제로아), 삶은 달걀, 과일 견과 믹스(하로셋) 등 각 음식은 고난과 해방의 상징으로서 그 의미를 나눕니다. 특히 네 잔의 포도주는 하나님의 네 가지 구원의 약속(출애굽기 6:6–7)을 기념하며, 함께 앉은 이들 모두가 구속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예식입니다.
이 명절의 전통은 "굶주린 자는 누구든지 와서 먹으라"는 유대인의 오랜 초대 정신에 따라, 이웃이나 공동체의 소외된 이들을 식탁에 초대하는 데 큰 의미를 둡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뜻깊은 명절을 홀로 보내는 노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족 중심의 명절이지만 배우자나 자녀 없이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는 오히려 외로움이 극대화되는 시기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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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약 22%가 홀로 살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유월절에도 함께할 가족이 없습니다. 과거 가족과 함께했던 명절의 기억은 깊은 그리움과 소외감으로 되살아납니다. 명절이면 오히려 조용한 집안의 적막함과 울리지 않는 초인종 소리는 노년의 고독을 더욱 크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의 고령층은 특히 유대 전통과 역사에 대한 정체성이 강해, 명절마다 세데르 식탁을 함께 차리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가족이 곁에 없는 유월절은 그들에게 단순한 외로움을 넘어, ‘공동체의 중심에서 멀어진 느낌’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더욱이 최근 이스라엘이 겪은 무력 충돌은 노인들의 고립감을 가중시켰습니다. 전쟁 이후 일부 노인들은 피난을 떠났고,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사회적 관계망도 단절된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대피 상황에서의 불안, 공습 경보 속 대처의 어려움 등은 고령층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봉사자가 찾아가도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음식은 문 앞에 조용히 놓고 돌아서야 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91세 니나 할머니는 전쟁 중에도 봉사자들이 조리된 식사를 배달해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녀에게는 그러한 사회적 연대가 삶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회는 독거노인들이 명절에 고립되지 않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정부는 유월절 기간 동안 독거노인을 요양원에 무료로 모시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숙식과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노인들이 함께 교류하며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2023년 하마스와의 전쟁 이후 처음 맞는 올해 유월절에는 대피한 북부 지역 노인들까지 포함해 지원이 확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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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단체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나이티드 하짤라(United Hatzalah)는 전국의 독거노인에게 유월절 음식 꾸러미를 전달하며, 무교병(מצה)과 포도주, 인사말 등을 포함한 꾸러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정기적인 자원봉사자 방문과 건강 체크, 말벗 활동을 통해 노인들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있습니다. 유월절 밤에 낭송되는 시편 113–118편의 ‘할렐(Hallel)’은 고통 중에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 구원의 기쁨을 공동체와 나누는 전통을 강조합니다. 이 때문에 유월절은 단순한 가족 명절이 아닌, ‘함께 나눌수록 완성되는 구속의 잔치’로 여겨집니다. 이 전통은 고립된 이들을 찾아 나서는 현대 이스라엘의 실천적 돌봄 문화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Adopt-A-Safta(“사프타”는 히브리어로 ‘할머니’) 같은 NGO는 젊은 세대와 독거노인을 1:1로 연결해, 매주 정기 방문하며 정서적 지지를 이어갑니다. 전쟁 중에는 자원봉사자가 크게 늘었고, 요일별로 돌봄을 제공받는 노인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민간 네트워크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따뜻한 사회안전망이 되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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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상황은 한국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설과 추석 등 가족 중심 명절에 자녀와 떨어져 혼자 지내는 어르신들, 그들을 위한 복지관과 교회의 식사 초대, 자원봉사자들의 명절 방문 등의 모습은 익숙합니다. "명절에만큼은 외롭게 두지 말자"는 정서는 이스라엘과 한국 모두에 살아 있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유월절의 경우 세데르 예식의 종교적 특성상 혼자서는 더 준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공동 식사 초청이나 식재료 배달이 필수적입니다. 명절은 누군가에겐 축복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깊은 시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곁을 지키는 따뜻한 손길이 존재함도 보여줍니다. 유월절 세데르 만찬의 첫 외침인 “배고픈 자는 다 들어와 먹으라”는 전통은, 단순한 초대를 넘어 이웃과 함께 나누는 구속 이야기의 실천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가치입니다. 정부, NGO, 이웃들이 한마음으로 문을 두드리고 빈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유월절의 정신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윤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점점 약해지는 가족 공동체 속에서, 주변의 홀로인 이들을 보듬는 '우리의 책임'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더욱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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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말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말라"(출애굽기 22:22). 또 전도서 4장 11절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고 합니다. 명절은 기억과 공동체가 만나는 시간입니다. 쓸쓸한 빈자리를 채우는 작은 초대와 배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따뜻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결국 소외 없는 명절을 만들어 갑니다. 오늘 우리의 식탁에는 누가 함께 하고 있을까요? 지금 떠오른 그 누군가에게, 작은 안부의 초대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이범수 지역전문가
20여 년 동안 이스라엘에 거주하며 이스라엘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성서학과를 졸업하고 Bar ilan University에서 이스라엘 학을 전공하였다. 주이 한국 대사관과 팔레스타인 대표사무소에 근무하며 지역 전반에 걸친 현안들을 경험하였고 현재 이스라엘 성서, 역사, 지리, 문화, 언어, 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와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