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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3-10-24

완벽한 미술관

⑭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뉴욕에 가보고 싶어한다. 물론 그 이유들은 아주 다양하다. 수 많은 이유중에 ‘셀 수 없늘 정도로 많은 미술관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가 필자의 방문하고 싶은 이유이다. 초대형 미술관도 여러 곳 있지만 중간 사이즈의 미술관들도 너무나도 그 퀄리티가 훌륭한 곳 New York. 그 중에서 오늘 방문할 곳은 뉴욕 맨하탄에 위치한 프릭 컬렉션이다.



피츠버그에서 철강 사업으로 수십년간 거대한 부를 축적했던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은 그의 지독한 경영방침으로 본인빼고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당하던 사람이었다. 탈세를 밥 먹듯이 하고 노조를 탄압하여 항상 경영 불화를 일으켰다. 미국 의회에서도 최악의 경영인으로 낙인찍히기도 하였지만 은퇴 후 프릭은 의외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죽기전까지 총 130여점의 명화를 수집하였다. 어쩌면 부의 축재와 절세를 위한 방편으로 오해받을만 했지만 그는 유언을 통해 이 작품들과 자신의 아름다운 저택을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으로 대중들에게 공개하도록 선언하였다. 그의 전성기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되는 이타적이고 순수한 결정에 많은 이들이 그 원인을 알고 싶어했지만 글쎄 평소에 자신의 재계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철강 산업의 카네기나 정유 산업의 록펠러가 말년에 자선 사업이나 문화산업에 열중하는 모습에 자극받을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해볼 뿐이다. 그 속마음은 아무도 확인할 수는 없었다.



1935년 12월 개관한 프릭 미술관은 그의 딸 (Helen Clay Frick)이 총 책임을 지고 지금의 완벽한 모습으로 만든 것인데 그녀는 적극적인 작품 구입으로 그야말로 완벽한 라인업을 구축하였다. 아버지 프릭의 그림에 대한 선구안이 아마추어를 훌쩍 뛰어넘는 완벽한 프로급이었는데 딸이 완벽한 화룡점정을 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토머스 게인즈버러, 조슈아 레이놀즈, 윌리엄 터너, 에드워드 드가와 르누아르,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램브란트, 앵그르, 한스 홀바인, 베르메르 등 초호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지난 원고에서 이미 소개했던 LA인근 패서디나의 노턴 사이먼도 미술관을 짓기 전 프릭 컬렉션을 벤치마킹하고 컬렉션 리스트에 대한 연구를 심각하게 선행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저택을 리뉴얼한 미술관이라 거실과 도서관과 방들이 아직도 생생히 그 모습을 유지하여 마치 부자집 친구집을 방문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코로나로 일반 관객의 출입이 어렵던 시기에 건물 리노베이션이 시작되었고 2024년도에는 재정비하고 개관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임시로 인근의 FRICK MADISON이라는 건물에서 일부를 전시하고는 있다. 재개관까지 방문을 미루는 걸 권하고 싶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오송빌 백작부인’


신고전주의 좌장이었던 자크 루이 다비드의 수제자였던 장 어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오송빌 백작부인은 프릭 미술관의 대표 작품중 하나로 여겨진다. 낭만주의와는 척을 지고 상호간의 엄청난 비방과 욕설이 오갔는데 그 중에서도 신고전주의 야전 사령관격인 앵그르는 들라크루아에게 심한 인신공격까지 해대던 화가였다. 그러나 앵그르는 점차 자신의 주제를 신고전주의의 주제들에서 벗어나 관능적 표현과 인체비례와 구도의 왜곡 등 또 다른 방향의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오송빌 백작은 프랑스의 유수한 집안 출신으로 외교관이자 학자였고 그의 부인 역시 좋은 가문의 자녀로 이미 몇권의 저서를 갖고 있는 재원이었다고 한다. 이 그림을 의뢰받고 앵그르는 무려 3년 동안 스케치하고 수정하고 완성, 다시 수정 재 작업하며 최선을 다해 작품을 완성하여 납품하였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그가 이미 인체 비례에 있어서 자신만의 표현법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완벽한 스케치실력을 자랑하는 앵그르가 모델의 오른쪽 팔을 어깨보다 한참 아래쪽에 그려넣고 또한 사이즈도 왼팔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그려넣었다. 이러한 표현은 루브르 박물관의 ‘그랑 오달리스크’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벌거벗은 모델의 등이 기괴할 정도로 길다는 것이다. 마치 척추뼈가 2-3개 정도 더 있는 사람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앵그르가 인체 소묘에서 실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앵그르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체의 묘사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수행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한스 홀바인 ‘토마스 모어’와 올리버 크롬웰


한스 홀바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독일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 거장이다. 스위스 바젤에서 화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고 일거리를 쫓아 런던까지 가게 된 홀바인은 궁전화가가 되어 유명한 ‘헨리 8세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궁전 화가이기 때문에 왕이 지정하는 수 많은 초상화를 그렸고 그 중에서 헨리 8세의 네번째 왕비가 되는 독일의 앤 공주(두번째 부인 앤 블린이 아님)의 초상화를 그려 오게 되는데 조국인 독일공주라 그랬는지 홀바인은 심할 정도로 그녀를 아름답게 표현했다. 헨리 8세는 초상화만 보고 만족하여 그녀를 불러들여 결혼식을 올렸는데 정작 만나보니 그림이 너무 과했던 것이었다. 왕은 불같이 화를 냈고 앤 공주는 6개월만에 이혼을 당했고 홀바인은 궁전화가 직책까지 빼앗기게 된다. 런던에서 사망할 때까지 불멸의 작품들을 계속 제작하였다.


프릭 컬렉션의 3번 전시실에 있는 토마스 모어와 토마스 크롬웰 두장의 초상화는 마치 두 사람이 옆으로 노려 보는 것처럼 전시되고 있는데 왼쪽의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을 결사 반대하여 왕에 의해 참수 당했던 영국의 존경받던 인문주의 정치가였다. 오른쪽에서 그를 노려보는 것 같은 토머스 크롬웰은 평민 출신에서 궁내 수석 장관까지 오르며 헨리 8세의 이혼부터 국교회 수장까지 모든 과정에서 왕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던 대신인데 결국 다른 정적들에 의하여 처형되고 만다. 수 많은 헨리 8세 관련 드라마나 영화들을 보면 한스 홀바인은 비록 가볍게 등장하지만 헨리8세와 토마스 모어, 토마스 크롬웰의 관계(그리고 천일의 앤공주까지)는 주요 스토리로 항상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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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두필 교수

한동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박사과정 수료했다. Paris 소재 CLAP35 Production 대표 감독(CF, Documentary)이며, 저서로는 좋은 광고의 10가지 원칙(시공아트), 아빠와 떠나는 유럽 미술여행(아트북스), 모두가 그녀를 따라 한다(다산북스),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다산북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인의 CF 감독(살림출판사) 등이 있다. 전 세계 미술관 꼼꼼하게 찾아다니기와 매일의 일상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기고 편집해 두는 것이 취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