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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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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8

에덴클래식 #23 기교를 넘어 감동을 주는 클래식



지난 6월, '제16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60년 역사상 최연소로 우승한 임윤찬은 결선 곡으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압도적 기교와 표현력으로 연주해 내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초월적 의지를 반영한 작품이라 말하는 초절정 기교의 피아노 협주곡 3번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Op.30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국제 음악 콩쿠르 중에서도 폴란드의 쇼팽 콩쿠르,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콩쿠르 그리고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트 콩쿠르는 피아노 부문에서 소위 ‘세계 3대 국제 음악 콩쿠르’라고 칭할 정도로 위상이 높다. 1974년 개최된 제5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 입상한 정명훈은 귀국 시 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 행사로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국가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출전한 반 클라이번  출처 :  VAN CLIBURN FOUNDATION


냉전 시대에 자국 문화 예술의 우월성을 서방세계에 알리고자 창설된 소련의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1958년 제1회 대회 우승자로 적대국인 미국의 반 클라이번을 심사위원들 만장일치로 선정했다. 24세의 반 클라이번(Van Cliburn, 1934~2013)은 국가 영웅 대접을 받았고, 그 역시 뉴욕시에서 카퍼레이드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은 반 클라이번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창설했다. 이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현재 미국에서 개최하는 가장 권위 있는 음악 콩쿠르로서, 피아노 부문에서는 쇼팽콩쿠르에 버금가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세계적인 피아노 경연 대회다.



출처 : 클라이번 콩쿠르 공식 사이트  https://cliburn.org/


올 6월에 거행된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는 한국인 임윤찬이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한국 젊은 음악가들의 국제 콩쿠르 우승 소식을 자주 접했기에 그리 흥분할 만한 뉴스는 아니었다. 바로 전 제15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도 한국인 선우예권이었고, 2015년 최고 권위의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자랑스러운 조성진이 있기에 임윤찬의 우승 소식은 그리 특별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의 2차 결선 연주곡을 유튜브로 검색해 잠시만 들어보려다 40여 분 동안 흠뻑 빠져들었다. 좋아하는 곡이라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Vladimir Ashkenazy, 1937~), 반 클라이번 등 대가들의 연주로 자주 접했고, 심지어 작곡가 자신이 직접 연주한 음반도 구매해 들었던 곡이었지만 18세 젊은 한국인 임윤찬의 연주는 그 대가들의 연주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 중 최대 난곡으로 꼽히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너무나 편안하면서도 때로는 현란한 기교와 파워를 곁들여 연주하는 임윤찬은 이미 대가 반열에 접어든 듯 보였다.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도 결선에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연주했고, 귀국 후 뉴욕 카네기 홀에서 라이브로 연주한 그의 음반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렇지만 내 귀에는 임윤찬의 연주가 반 클라이번 연주보다 좋게 들린다.



자신의 집에서 스테인웨이 피아노로 연주를 하고 있는 라흐마니노프 (1936 or before)   출처 : wikipedia


러시아의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 1873~1943)는 9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일찍이 피아니스트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12세에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학한 후에는 작곡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렇지만 17세에 발표한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과 24세에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교향곡 1번이 모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자 심한 우울증에 걸려 한동안 작곡에 손을 대지 못했다. 4년간의 공백 기간을 거친 후, 우울증을 완전히 극복한 28세의 라흐마니노프는 두 번째 협주곡을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발표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구조적으로도 완벽하고 낭만적 서정성이 풍부한 2번 협주곡은 그의 최고 걸작일 뿐 아니라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과 더불어 러시아 피아노 음악을 대표하는 명곡으로 인정받았고,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1906년(33세) 독일 드레스덴으로 이주한 라흐마니노프는 세 번째 협주곡을 준비했다. 그리고 1909년 미국 순회 연주 여행 중에 완성해 자신의 피아노와 뉴욕 교향악단의 협연으로 초연했다. 3번 협주곡은 낭만적 서정성이 풍부한 2번에 비해 대중적인 인기가 덜하고 녹음된 음반 수도 현저히 적지만 작품성이나 스케일, 기교적인 묘미 등은 2번을 능가한다. 작곡가로서뿐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을 미국 무대에 화려하게 드러내 보이고자 심혈을 기울인 작품으로, 가공할만한 테크닉과 더불어 세련된 작곡기법이 드러나는 명곡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친한 친구이자 당대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요셉 호프만(Josef Hofmann, 1876~1957)에게 헌정했으나 손이 작았던 호프만은 이 3번 협주곡 연주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름 별장 이바노프카에서 피아노 협주곡 3번을 교정하고 있는 라흐마니노프, 1910     출처 : wikipedia


전체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3번 협주곡은 연주시간 40분가량의 대곡으로 라흐마니노프의 4개 협주곡 중 가장 스케일이 크고 웅장하며 비르투오소적인 기교와 정열이 넘쳐난다.


현악과 바순(파곳)의 짧은 서주로 시작하는 1악장은 곧바로 피아노에 의해 서정성이 듬뿍 담긴 아름다운 주제 선율이 제시되고, 뒤이어 관현악과 대화하듯 주제 선율을 전개해간다. 고전주의 소나타 형식이지만 아주 자유롭게 악상이 전개되고 변주되면서 점차 긴장감을 더해가다 카덴차(cadenza, 악장이 끝나기 직전에 독주자가 연주하는 기교적이고 화려한 부분)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그 열기를 식히듯 온화한 주제 선율이 재현되며 조용히 끝을 맺는다.


아름다운 오보에 선율을 이어받아 관현악으로 전개되는 2악장 초반부는 아다지오의 빠르기로 지극히 평온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피아노가 나타나면서 그 평화로움은 깨지고 다소 소란스럽게 관현악과 대화를 이어간다. 화려하고 정열적인 모습으로 흥분해가는 피아노를 제지하듯 관현악은 줄곧 온화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가지만 결국 한계에 달한 듯 피아노의 찬란한 질주에 합세한 후 격정적인 3악장으로 안내한다.


장대하면서도 야성적이고 화려한 3악장은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악장이다. 비르투오소 적인 기교와 힘, 그리고 정열이 낭만적 서정성과 어우러져 10여 분 내내 벅차오르는 가슴을 좀처럼 진정시키기 어렵다.



월트 디즈니와 호로비츠, 라흐마니노프가 함께한 모습 (1942)   출처 : Walt Disney Family Museum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라흐마니노프는 그 이듬해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많은 러시아 음악가들이 미국으로 건너왔고, 우크라이나 출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3~1989)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928년 차이콥스키 협주곡으로 성공적인 미국 데뷔 공연을 마친 25세의 젊은 호로비츠는 한 달 후 라흐마니노프의 3번 협주곡을 연주했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접한 라흐마니노프는 감격해 이런 말을 남겼다. “이것이야말로 항상 꿈꾸어 왔던 내 협주곡의 연주 방식이다. 지구상에서 이런 연주를 듣게 되리라고는 전혀 기대해 본 적이 없다.” 


호로비츠의 성공적인 연주 이후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연주하고 음반도 남겼다. 그중에서 과연 호로비츠만큼 작곡가의 맘에 들었을 연주는 얼마나 될지 모르겠으나, 18세의 임윤찬이 연주한 3번 협주곡을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들었다면 감격의 포옹을 해주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 음악 들어보기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2022년 제 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 2차 결선 실황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 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