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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5

술 취한 이들의 일장춘몽 <어나더 라운드> (2021)



술에 대한 평가는 천차만별이다. 대개는 크고 작은 즐거움이라 여기는 반면, 누군가에겐 두려움이 되기도 하고, 술이 주는 몽롱한 기분을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일탈로 보기도 한다. 이번 달의 영화는 삶과 술에 관한 사유를 선물한다.



술 권했던 사회

음주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대학 새내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유년기 때부터 아직 마셔보지도 않은 술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을 느끼며 성장했다. 생각해보면 주일학교 시절부터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잔만 마셔도 시뻘게진 얼굴로 온 몸을 박박 긁어대던 아빠의 모습을 목도한 그 날부터 아마 공포의 서막은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나에게도 술을 거부하는 유전자가 있겠지?’ 라는 생각은 점점 두려움이 되었고 머지않아 사실로 증명 되었다. 

예상은 정확했다. 개강총회가 시작될 무렵 조용히 빠져나가다가 덜컥 뒷덜미 잡힌 나는 선배들이 무서워서 정신없이 술을 꿀꺽꿀꺽 삼키다가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결국 새벽녘 쯤 귀가해 살면서 엄마에게 들을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웠던 건, 가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두통과 가려움의 습격이었다. 전신으로 번진 두드러기를 참지 못하고 수십 번 찬물을 끼얹다가 결국 동 틀 무렵 응급실에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다. 앰뷸런스 문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을 실눈으로 바라보며 연신 훌쩍거린 기억이 난다.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다신 안 마실게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

어쨌든 끔찍한 숙취의 악몽은 내 뇌에 상흔을 입힌 듯 했다. 한동안 술 냄새만 맡아도 위장이 급격하게 울렁거리고 미미한 편두통이 생기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놀라운 사실은 2022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 술을 친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속으로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체내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며 변화된 삶을 경험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이다. 역사와 체육, 음악, 심리학을 가르치는 이 네 명의 고교 남교사들은 매사 의욕이 없다. 특히 역사담당 마르틴(매즈 미켈슨)은 신임 교사 시절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열정적인 교사였으나 지금은 무기력의 정점에 놓여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마르틴의 태도에 대해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지만 이마저도 그 때 뿐이다. 무기력에 빠져 눈물까지 흘리던 어느 날 생일파티 차 만난 네 명의 남자들은 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바로 술을 마시고 수업을 진행하는 것!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긴장도 풀리고 적당히 활발해진다는 이 흥미로운 가설을 시험해보고 싶은 이들은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고 수업을 진행한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대 성공을 가져온다. 이제 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교사가 된 마르틴은 이번엔 항상 냉랭한 기운만 감싸고 있던 가족들과의 관계 또한 이 실험을 통해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며 네 명의 친구들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전작 <더 헌트>로 잘 알려진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신작 <어나더 라운드>는 술에 대한 애정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화 같다. 특히 계속해서 체내 알코올 농도를 유지하며 무기력을 극복하고, 누구보다 에너지 넘치는 일상을 보내는 인물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이전에 없던 온기와 잃어버렸던 그들의 삶의 의미마저도 느껴진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기획단계에서 제목 <드렁크>라는 제목을 <어나더 라운드> (한 잔 더 부탁해요!)로 바꾼 것은. 술을 소재로 삼은 영화들은 많지만 술에 대한 애정 혹은 안타까움을 이렇게 탁월하게 잡아낸 영화는 드물다. 2021년 영국아카데미와 미국아카데미에서 각각 외국어영화상과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으며, 인류의 역사 그 곁에 항상 존재했던 술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을 담고 있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내가 술을 마시는가, 술이 나를 집어 삼키는가

<어나더 라운드>는 마치 술 취하는 과정을 은유하듯 3개의 작은 장으로 나뉜다. 첫 번째 장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며 일상을 경험하는 실험이다. 학교에서 타 교사들 몰래 홀짝거리며 술을 마시는 이들의 표정에서는 장난꾸러기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익살이 너울거린다.

인기 있는 교사, 다시 회복된 가족, 동료들과의 유쾌한 관계까지. 인물들은 이 챕터에서 가장 큰 성공과 만족을 느낀다. 이를 계기로 인물들은 두 번째 장을 시작한다. 술 취하는 정도는 각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좀 더 마셔보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는 얼마안가 ‘갈 때까지 마셔보자’로 바뀌는 세 번째 장을 향해 달려간다. 이 영화의 현명한 지점은 세 번째 장에 이르기까지 각 장의 전개가 상당히 유려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이들이 술로 인해 느꼈던 최고의 순간부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지점에 이르는 그 변화의 폭을 감지하기 힘들게 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면 술의 속성이 그러하다. 약속과 규율이 사라지는 순간 그저 이 선생님들은 호감에서 민폐로 변하는 술 취한 통제 불능자일 뿐이다. 술의 농도는 유지하되, 일과 후 저녁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던 약속이 무너지는 순간, 이들의 삶은 은근슬쩍 무기력의 자리로 회귀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실체를 마주하는 인물들의 진심어린 절규는 해결될 것 같았지만 결코 불가한 인생사의 문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마르틴의 경우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던 아내와의 관계는 일시적인 착각이었을 뿐, 술의 힘에 의지해 억지로 감춰뒀던 진실은 결국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다.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 만족스러운 기억들이 지나가고 큰 고통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 마르틴은 이전처럼 지루한 선생님 그리고 가족과 소원해진 가장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아빠, 그동안 술 마시고 우리와 함께 했던 거지?”

영화 속 가장 극적인 순간은 술의 힘을 통해서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마르틴의 비밀을 아들에게 들킨 순간이다. 가족에 대한 마르틴의 진심은 술로 인해 오인되고, 그 오인은 마르틴을 회복하지 못하게끔 이끈다. 이는 마르틴 뿐 만이 아니다. 체육교사 톰뮈는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교무실을 휘젓고 다니다가 징계를 당하고 결국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시간이 지나면 그렇듯 술은 깨게 마련이고 모든 것은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술을 마신다. 술이 우리 삶의 어떤 것도 해결해줄 수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의 시름과 고통을 잠시나마 술에 의지해 잊고 싶은 마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술을 찾고 지금도 술을 마시며 잠시나마 찾아 올 달콤한 꿈을 기다린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일장춘몽, 그 꿈에서 깨고 나면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요즘 소소한 반주가 즐거움이 된 나에게 더 이상 술자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무엇보다 요즘은 술을 강제로 권하는 사회 분위기도 아닐 뿐더러 취하기 위함 보다 적당한 음주를 즐기는 것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큰 몫을 한 것 같다. 요즘 나는 남편과 함께 매일 저녁 사케를 홀짝 거리기 시작했다. 참 신기하다. 그렇게나 공포스럽게 느끼던 술을 내가 먼저 찾는 시기가 오다니. 사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세상에 내려앉은 슬픔과 어두운 소식들을 듣게 된다. 꽃다운 젊음의 죽음, 탐욕이 불러온 전쟁과 수많은 희생, 각박해진 세상 속 꿈꿀 수 없는 희망은 깊은 우울감이 되어 우리를 찾아왔다. 세상 시름을 잊고 싶기도 하고, 코로나로 인해 단절된 일상이 적적하게 느껴져서 작은 술잔을 기울이던 것이 이제는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맨 정신으로 살기에도 부족한 세상에서 음주가 웬 말이냐’를 외치던 스무 살의 나는 이제 ‘맨 정신으로 과연 살 수 있는 세상이긴 한 걸까’를 의심하는 소규모 음주가가 되어간다. 한편으론 이젠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는 사회에서도 자진해서 술을 찾아 마시는 나는, ‘정말 맨 정신으로 잘 살고 있는 걸까.’ 생각한다.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