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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9

에덴클래식 #12 빛나는 삶을 녹여낸 클래식




오페라는 인간의 풍부한 면면을 마주할 수 있는 장르다. 다채로운 본연의 감정들과 경이로울 수준의 창법까지 듣는 재미가 상당하다. 어느 때보다 조용한 연말연시, 허전한 마음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상과 삶을 녹여낸 오페라 한 곡이면 달래볼 수 있을 것이다.


벨리니 : 오페라 ‘노르마’ Vicenzo Bellini, Opera ‘Norma’

오페라는 음악으로 전개되는 연극이다. 중세 시대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신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 말엽, 1600년경 탄생한 음악극 장르로, 400년의 역사를 지녔다.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학자들, 시인, 음악가들은 고대 그리스 비극이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노래로 공연되었다고 믿었으며, 이 고대 장르를 재탄생시키고자 노력했다. 1598년에 이탈리아 작곡가 야코포 페리Jacopy Peri가 발표한 무대음악 ‘다프네’는 처음부터 끝까지 극 줄거리를 노래로 구성한 최초의 오페라라고 전해지지만, 악보가 일부만 남아있어 감상할 기회는 없다. 이후 몇 편의 오페라가 등장하였으며, 일반적으로 근대적인 개념의 오페라 효시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가 1607년 발표한 첫 오페라 ‘오르페오’로 본다. 이렇게 르네상스 시기 말엽에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오페라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비발디, 헨델 등 바로크 시대 음악가들과 모차르트, 베토벤 등 고전주의 음악가에 의해 발전했고,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벨리니가 태어난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카타니아에는 벨리니 극장이 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촉발된 자유 평등 사상은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쳐 정치, 사회뿐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음악계에도 이성과 형식을 중요시했던 고전주의를 탈피해 개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새로운 물결이 몰려왔다. 낭만주의 음악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문학적 소재를 음악과 연결시킨 예술 가곡, 교향시 등 표제음악이 등장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가 중심 장르로 자리 잡아 수많은 걸작 오페라들이 탄생했다. 낭만주의 초기 작곡가인 로시니의 오페라들은 모차르트의 작품들과 같이 희극적인 스토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이어 등장한 이탈리아의 초기 낭만주의 오페라 작곡가들은 주로 비극적인 사랑, 삼각관계로 인한 갈등과 같이 정열적이고 극적이며, 때론 환상적이기까지 한 인간 본연의 모습들을 서정성이 풍부한 선율로 그려내 큰 성공을 거뒀다.


그중 로시니Gioacchino Rossini,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벨리니Vincenzo Bellini 등 3명의 작품을 벨칸토 오페라라고 칭한다.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벨칸토bel canto’는 음악 용어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가창법’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색, 고음부터 저음까지 균일한 소리, 화려한 기교 등이 특징인 가창법을 중심으로 하나의 오페라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벨리니의 ‘노르마Norma’가 우선 떠오른다.



벨리니는 여전히 카타니아를 상징하는 음악가로 도시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시칠리아의 항구도시 카타니아에서 작곡가의 아들로 태어난 빈첸초 벨리니(1801~1835)는 어려서부터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나폴리음악원 재학 시절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오페라에 매료되어 오페라 작곡가의 길로 접어든 벨리니는 1827년(26세)에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진출해 오페라 ‘해적’을 발표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탕으로 작곡한 ‘캐플릿가와 몬테규가’(29세)를 비롯해 ‘몽유병의 여인’(30세), ‘노르마’(30세) 등 연이어 발표한 작품들도 큰 성공을 거두어 일약 유럽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1833년(32세)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벨리니는 이듬해 ‘청교도’를 무대에 올려 파리 관객들을 열광시켰으며, 프랑스 왕실에 초대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8개월 후 과로로 인한 급성 장염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청교도’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34년의 짧은 생애를 살며 총 10편의 오페라만을 남겼지만, 습작으로 볼 수 있는 초기 작품 두 편을 제외한 나머지 8편의 작품은 약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공연된다. 그중에서도 작곡가 자신이 가장 애착과 자부심을 지녔던 작품은 ‘노르마’로, 삼각관계의 사랑 이야기를 장엄하고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대본에 서정적인 아름다운 선율을 가득 담아내 벨칸토 오페라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노르마의 줄거리

배경은 기원전 50년경,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갈리아 지방(지금의 프랑스, 벨기에)의 드루이드교(켈트족의 종교) 신전이다. 드루이드 교인들은 로마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신의 계시가 있어야 하고, 그 계시는 여제사장 노르마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노르마는 전쟁을 기다리는 군중들을 향해 “신의 뜻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고 하면서 진정시킨다. 사실 노르마는 순결을 지켜야 하는 여제사장의 규율을 어기고 은밀히 로마 총독인 폴리오네를 사랑해 그의 두 아이를 낳았고, 사랑하는 남자와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폴리오네는 더 이상 노르마를 사랑하지 않고 대신 새로운 연인인 젊은 여사제 아달지사와 함께 로마로 귀환하고 싶어한다.

폴리오네에게 배신당한 노르마는 자살을 결심하고 아달지사에게 두 아들을 데리고 폴리오네와 함께 로마로 가라고 하지만 아달지사는 사랑을 포기하고 신전에 남는 것을 택한다. 사랑이 증오로 변한 노르마는 로마인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쟁 분위기가 고조에 달할 때 폴리오네가 군중들 틈에 있다가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 나온다. 아달지사를 로마로 데려가기 위해 신전에 몰래 잠입했던 것이다. 이 로마인을 처형하기 전에 비밀리에 조사할 것이 있다고 얘기하며 노르마는 군중들을 물러나게 한다. 둘만 남게 되자 노르마는 폴리오네에게 아달지사를 단념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하지만 거절당한다. 노르마는 마지막 아리아 ‘배신당한 마음’을 부르며 폴리오네와의 사랑, 두 아이에 대한 연민 등을 호소한 후 화형대의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녀의 숭고한 사랑에 감동한 폴리오네도 그녀 뒤를 따른다.



34년이라는 벨리니의 짧은 생에서 노르마는 가장 손꼽히는 작품이다.


노르마의 대표 아리아

-정결한 여신 Casta Diva

여제사장의 신분으로 금지된 사랑을 한 괴로움, 폴리오네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충정 사이에서 번민하는 심정을 노래하는 장대한 아리아. 모든 벨칸토 아리아 중에서 가장 유명한 명곡이며, 넓은 음역대, 기교적인 어려움, 복잡한 심정 표현 등을 다 소화할 수 있는 소프라노만이 제대로 부를 수 있는 난곡이다.


-들어보세요, 노르마 Mira, Norma

로마총독 폴리오네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임을 알게 된 노르마와 아달지사가 서로 양보하려는 상대방의 진심에 감동하면서 부르는 2중창. 두 사람간의 신뢰와 사랑의 감정을 엄숙하고 진지하게 노래한다.


-마침내 그대는 내 수중에 In mia man alfin tu sei

잡혀 온 폴리오네에게 아달지사를 단념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노르마와 이를 거절하는 폴리오네가 함께 부르는 2중창. 비장미가 넘친다.


-배신당한 마음 Qual cor tradisti

여사제로서의 규율을 어긴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 후 화형대 불길 속으로 들어가기 전 자신의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고백하는 노르마의 아리아. 폴리오네와 군중들 모두를 감동시킨다. 



마리아칼라스라는 전설적인 소프라노의 등장은 오페라의 역사를 바꾸었다.


벨칸토 창법은 목소리를 악기처럼 최대한도로 활용하고 제어하기 위해 엄청난 훈련이 필요한 창법이었다. 점차 배역을 소화해낼 소프라노가 부족해지면서 공연 횟수도 줄어들었고, 19세기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노르마를 비롯한 대부분의 벨칸토 오페라들이 잊혀 갔다. 반면, 극장과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확대되어 중량감 있고 큰 성량이 필요한 새로운 창법이 유행하면서 베르디, 바그너 등 새로운 오페라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20세기 중반, 다름아닌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의 등장으로 벨칸토 오페라가 재주목받기 시작한다. 천재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100년간 잠들었던 작품들이 다시 빛을 발했고, “칼라스의 노르마인가, 노르마의 칼라스인가”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노르마는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정결한 여신Casta Diva’을 그 목소리로 듣고 나면 웬만해선 다른 소프라노의 노르마 음반엔 손이 가질 않는다.




♪ 음악 들어보기


벨리니 : 오페라 ‘노르마’ Bellini, Opera ‘Norma’


-정결한 여신 Casta Diva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마침내 그대는 내 수중에 In mia man alfin tu sei




-배신당한 마음 Qual cor tradisti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