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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에세이
2021-12-04

누구나 이야기가 있다



스스로 평범하기 그지없다 생각하는 모습도 타인에게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되곤 한다. 특히 세월이 지날수록 삶의 곁가지와 잡음이 사라지고 남는 연륜의 빛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월과 나이에 상관없이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서 김유경 작가가 전해 온 이야기.


어쩌다 보니 한 30년 글쓰기를 가르쳐오고 있다. 어린 학생들만 상대할 땐 글 잘 쓰는 걸 가르치려 애썼지만, 청소년이나 엄마들, 어르신과 만나면서 점차 방향이 달라졌다. 글로 자기 탐색과 성찰을 시도하는, ‘글쓰기 치료’란 분야였다. 이와 관련하여 공부를 할 때였다. 시어머니를 대상으로 과제를 한 기억이 난다. 자연스레 어머니 인생사 깊숙이 들어가게 된 것도, 과제를 위해 지난 삶을 나누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어느 자식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내밀한 인생이 한 권의 책처럼 내 앞에 생생히 펼쳐졌다. 어느새 시어머니는 지워지고 오롯이 한 인간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직업의 특성상 어르신들과 프로그램을 할 기회가 가끔 있다. 대부분 한글을 제대로 모르시기 때문에, 묻고 듣는 게 대부분이다. 다들 처음에는 할 말 없다 손사래 치지만 한두 마디 묻다 보면 금세 절절한 속내를 풀어놓는다. 저마다 처지는 달라도 애쓰며 걸어온 인생 여정이 여느 신화 속 영웅의 서사 못지않게 눈물겹고 애틋하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각자 인생에선 영웅이지 않을까. 영문도 모르고 던져진 이 세상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살아내니 말이다.


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히고 말았을 기억들. 그 기억들이 이야기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걸 보는 것은 이 일의 보람이다. 하는 거라곤 싹을 잘 틔우도록 그저 묻고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다만,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누구도 그들에게 다시 물어봐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한 차례 이벤트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만약 일상에서도 기억을 꺼내 함께 나눌 존재가 있다면 또, 그게 자식이라면 더없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반면, 자식들 반응은 전혀 뜻밖일 때가 있다. 한번은 열심히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어르신의 딸이 반대하고 나선 적이 있다. 못 살던 옛 기억을 부끄럽게 왜 끄집어내느냐는 항의였고, 다른 이의 며느리도 비슷한 이유로 막아섰다. 사업하는 아들 명성에 방해가 된다나….




아마도 그 딸은 영원히 듣지 못할 것이다. 다섯 자식의 도시락을 싸놓고 새벽같이 밭으로 달려간 어머니가 종일 밭이랑에 점처럼 박혀 김매던 나날의 심정을. 다른 노인의 아들과 며느리도 결코 모를 것이다. 홍역으로 펄펄 끓는 젖먹이 아들을 안고 밤새 그 어머니가 읊조렸던 간절한 기도를. 어르신들 기억은 점점 흐려진다지만 때로는 그것을 놀랍도록 선명하게 붙잡고 있기도 했다. 강렬한 감정과 맞닿은 기억이고 또, 삶과 단단히 묶인 매듭일 테니 말이다.


내가 시어머니의 일상을 책으로 쓴 것은 거창한 서사가 있어서가 아니다. 올해 아흔 살, 1930년대 변방의 섬에서 태어나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이 90년을 살아낸 사람.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궁핍한 무대에서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살아낸 시간은 얼마만 한 무게일까? 그녀는 그 고단한 세월을 건너와 지금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낸다. 어제보다 나은 산수 풀이 실력을 위해 연필을 쥐고, 기억을 붙잡으려 별일없는 일상도 꼬박꼬박 기록하며, 경로당 일자리에 성실히 출근한다. 자리보전하기 전엔 아들네와 합가도 싫다며 아파트를 얻어 직접 살림을 꾸려간다. 내가 감동한 것은 오히려 별것 없는 생활에도 마음을 다하는 이 모습이다. 삶은 꼭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니까. 무의미하리만치 평범한 일상이 삶의 무대이고, 그 무대에서 우리는 오늘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다. 


매주 토요일이면 시어머니를 만나 그동안 풀어놓은 산수 문제 채점도 하고, 읽은 시에 대한 소감도 듣는다. 경로당에서 겪은 일상도 나눈다. 그러다 엉뚱한 산수 문제 풀이나, 경로당의 소소한 사건에 구십의 노모와 아들, 며느리가 한바탕 웃어대기도 한다. 웃음소리가 창가로 쏟아지는 환한 햇살에 버무려져 거실을 가득 채운다. 그때, 가슴 속에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은 따뜻함이 뭉클, 솟아난다.

"부모님께 말을 걸어보세요. 소중한 이에게 지난 삶을 물어보세요.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인생사를 펼쳐 찬찬히 읽어 보는 겁니다. 그 안에는 애쓰며 살아온 영웅의 서사가 굽이굽이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기억의 문을 열고 들어와 마음 다해 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서두르세요, 그 문이 영원히 닫혀버리기 전에.”

김유경 작가, 글쓰기 교사

국어국문학, 철학, 예술상담학 등을 공부했다. 아동, 청소년, 학부모, 노인 등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자기탐색과 치유의 글쓰기 강좌를 진행한다. 교육에세이 <제주에서 크는 아이>와 시어머니의 일상을 재구성한 에세이 <구십도 괜찮아>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