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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1-07-21

기억과 상실을 이야기하는 아삭한 사과 한 입. 영화 <애플> (2021)



길고 긴 낮에 이어 돌아오는 더운 밤, 베개맡에서 시작되는 생각은 꼬리가 길다. 하지만, 여름 밤이 아니라면 언제 또 이토록 생각에 빠져볼 수 있을까. 7월 에덴미디어와 함께 공상인 듯 아닌 듯 영화 <애플>의 이야기에 빠져보시길 바란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셰익스피어의 고전 <리어왕>의 1막 4장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이다. 한때 세상을 통치하던 리어. 그런 그가 딸들에게 모욕적인 경험을 당한 후 무력하고 절망적인 현재 본인의 모습 사이에 괴리를 느끼며 던졌던 말로 기억한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당신이 아는 당신은 누구인가? 아마도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 역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야 할 때,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름, 배경, 인간관계, 하는 일 등 내가 누구인가에 앞서 나를 구성하는 무엇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어느 순간 잃어버린다면? 혹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잊어버린다면? 기억이 모두 소멸된 인간에게 과연 ‘나’는 어떤 존재로 느껴질까. 이런 점에서 오늘 소개할 영화 <애플>은 기억과 망각 그리고 존재론적인 나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의 지점을 던져준다.



영화 <애플>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어느 날, 기억을 잃어버리다.

<애플>은 몇 번을 보아도 낯설고, 조금은 기이한 영화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잠시 잠이든 한 남자(알리스 세르베탈리스). 잠에서 깬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분증마저도 없어 누구인지 알 길이 없는 이 남자. 신기한 건 신고를 받고 그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기관 사람들의 표정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다는 것이다. 무심하게 남자의 얼굴 사진을 찍고, 의례적으로 기억력 테스트를 하는 이들. 그러나 이들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 이 도시는 언제부턴가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폭등하고 있는 중이다. 운전하는 도중에, 혹은 경기를 관람하다가, 뜻밖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기억을 잃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실려 온다. 그나마 다행인 케이스는 갑자기 사라진 그들을 가족이 애타게 찾는다거나, 병원에서 실시하는 기억 찾기 훈련을 통해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는 경우이다. 그러나 남자의 경우는 최악의 상황이다. 신분증도 없고 기억 찾기 점수도 매우 낮은 데다가 무엇보다 이 남자를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애플>은 과거를 송두리째 잊어버린 남자가 강제적 경험을 만들고, 새로운 기억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과연 남자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며 앞으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사진은 기억을 다루는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출처: 네이버영화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는 많다. 주인공이 기억을 잃은 상황을 기점으로 진행되는 사건이나 만나는 인물들은 전사-영화 시작 부분에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설정과 정보. 예를 들면 인물의 이름이나 성격 배경 등이다.-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특수할 것 없어 보이는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주인공과 관객 모두에게 모든 상황은 미스터리이거나 예측할 수 없는 긴장의 연속이다. 우리가 다음을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가 남긴 정보를 기반하고 있기 때문인데 흔히 이 정보를 우리는 ‘기억’이라 부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는 단기 기억상실증인 주인공이 흐려지는 기억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기록해두거나 심지어 자신의 몸에 표식을 남기며 오로지 마지막 남은 기억을 좇는다. 바로 사랑하는 아내가 살인을 당했다는 것과 그 범인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그것이다. 한편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측면에서 알츠하이머(치매) 소재의 영화도 종종 등장한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여주인공은 점차 사랑하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여자와,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와의 모든 것을 기억하려 하는 남자. 이것은 최루성 한국 멜로영화의 틀을 고스란히 입고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최근엔 기억상실이란 콘셉트를 단순히 망각으로 인한 슬픔과 안타까움의 정서로 풀어놓지 않고 망각한자의 눈으로 본 세상, 즉 기억을 잃은 자의 주관적 시점을 중심으로 서사를 끌어가는 케이스가 부쩍 늘어났다. <스틸 앨리스>나 <더 파더>의 경우, 기억을 잃어가는 인물의 심리와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생경한 세상의 풍경을 이미지적으로나 장르적으로도 손색없이 그려낸 작품이다.


그런데 <애플>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거나, 잃는 과정에서 분출하는 인물의 심리를 표현한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는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새로운 삶의 기억을 만들기 위해 프로그램에 제시하는 미션을 꾸준히 수행한다. 자전거를 타보고, 코스튬 한 채로 클럽에 간다거나 직접 낚시를 해 특정 물고기를 잡는 등 우리가 살면서 한두 번은 해봤을 단순한 경험에서부터, 죽어가는 환자 옆에서 이야기 들어주기, 일부러 나무에 차 들이박기 같은 부담스럽고 당황스러운 일도 있다. 하지만 남자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충실하게 이행한다. 기억이란 소재에 대해 <애플>이 접근을 하는 방식 중 하는 바로 ‘기록’이다. 인간의 기억은 생각보다 유약해서 사라지거나 변질된 위험성이 높은, 불완전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일기를 쓰거나 목소리를 남지고 때로는 영상으로 기록을 해 둔다. 지나간 시간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만들기 위한 인간의 욕심인 걸까. 어쨌든 남자는 이 새로운 경험을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정성껏 사진을 찍는다. 그것은 이제 그 남자의 기억이 되었을까? 그 행위들이 이제 그를 어떤 특정한 누군가로 지칭해 줄 수 있게 된 걸까?



남자에게 기억은, 사과는 어떤 존재일까. 출처: 네이버영화


남기고 싶은 기억. 망각하고 싶은 기억.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애플>은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종일관 표정 없는 남자의 얼굴일 것이다. 새로운 기억거리가 쌓인 이 순간에도 그는 기억을 잃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다. 기계적으로 미션을 수행하고 있지만 새로운 경험으로 인한 어떠한 반응도 없는 남자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질 무렵, 그 표정의 의미를 희미하게 읽어낼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사과를 좋아하는 남자는 언제나처럼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한 아름 골라 들고 있다. 단골에게 말을 걸고 싶었는지 과일가게 사장은 “사과를 많이 먹으면 기억력도 좋아져요”라는 말을 슬쩍 흘리는데 이때 남자는 집어 든 사과들을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결국 남자는 영화의 시작부터 기억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닌, 남아있는 기억을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기억의 또 다른 속성을 언급한다. 즉 아무리 덮으려고 하고 애써 모르는 체 하더라도 어떤 종류의 기억은 분명 사라지지 않고 더 선명해진다는 것.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쓰려던 그의 노력은 타인의 죽음을 기리는 미션을 앞두고 하염없이 무너져버리고 만다. 아마 과거 상실의 기억이 그를 놔주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이에 대한 상실은 아무리 새로운 것으로 덮어씌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영화의 엔딩, 남자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전 기억이 남아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저기 상실의 흔적이 남아있는 남자의 집. 그는 커튼을 과감하게 걷고 오래된 사과 하나를 집어 든다. 남자에게 맛있는 사과에 대한 기억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가항력적으로 뇌리에 박히는 ‘무엇’이다. 남자는 모든 기억을 받아들이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사과를 먹기 시작한다. 상한 부분은 도려내고 남은 부분을 먹는 남자는 지금 가장 평온한 얼굴이다.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덮어씌우려 한들 내 의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힘들면 잠시 덮어두되 잊지 않고 다시 꺼내 보며, 그렇게 기억을 품고 함께 힘든 한 걸음을 내 딛는 것. 때론 그 고통의 기억이 다른 방식으로 갈고 닦여 삶을 지탱해줄 소중한 경험으로 변화하길 기대하며 살아가는 나날들. 그 과정이 우리의 인생 그 자체 아닐는지.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