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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된 기억과 삶
<파이널 컷>(로빈 윌리엄스 주연, 2004)이라는 영화가 있다. 먼 미래에 있을법한 상황을 설정하여 삶의 속살을 들추는 작품인데, 인간의 기억과 기록을 소재로 하고 있다. 첨단기술 회사가 개발한 특수 칩을 뇌에 심어놓으면, 그 사람이 살면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이 기록된다. 저장되는 데이터는 시각 영상으로, 눈을 뜨고 생활하는 동안 시야에 들어온 장면이 모조리 녹화되는 것이다.

영화 파이널 컷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주인공의 직업은 유명 인사나 부호들이 죽은 이후에 유족들의 의뢰를 받아 고인의 특수 칩에 담긴 자료를 편집하는 일이다. 부끄러운 일들은 지우고 사람들에게 칭송받을 만한 장면들만 골라낸다. 그렇게 해서 제작한 영상물은 추도식에서 공개되고, 참석자들은 고인의 숭고한 생애에 탄복한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이 자신의 뇌에도 조이칩이 심어져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한다. 죽은 뒤의 내 모습을 편집할 수 없다면,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어떤 장면들을 남기며 살 것인가.
사후(死後)의 시간, 타인의 뇌리에 남는 것
인간의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승 너머의 저승으로 옮겨가기 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은 사람에 따라 또는 문화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내세를 믿든 믿지 않든,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자신이 죽고 나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자신이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완전한 죽음은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을 때 이뤄진다는 말도 있다. 그 기준으로 보면, 보통 사람들은 사망 후에 백 년 정도 이 세상에 더 머물게 되고, 공자나 뉴턴 같은 위인은 ‘영생’을 누리는 셈이다. 누구나 역사 속에 여러 가지 무늬와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모양이 될지는 살아 있을 때의 모습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당대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렸지만 죽음과 함께 거의 완전히 잊히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고흐나 카프카처럼 생전에는 무명이었지만 사후에 최고의 반열에 오른 예술가도 있다. 이완용이나 스탈린처럼 평생 부귀와 호사를 누렸지만 죽고 나서는 대대손손 배신자나 폭군의 낙인을 받을 수도 있고, 예수나 소크라테스처럼 극한의 푸대접을 받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인류의 커다란 스승으로 추앙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누구나 좀 더 훌륭한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것이다.
일상의 사소한 장면이 이루는 인상
그런데 남겨진 사람들의 기억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는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다. 영화에서 머릿속에 심어놓은 칩의 영상 기록을 편집하여 가장 훌륭한 생애 스토리를 조작한다는 허구적 설정 자체가 그것을 반증한다.
타인들의 기억 속에 남을 자신의 이미지를 꾸미기 위해 최첨단의 기법이 발명될 만큼 에고의 욕망은 강렬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애처로운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완벽하게 조작할 수는 없지만, 꾸준한 덕행은 자연스럽게 좋은 기억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 우리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업적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낯선 사람에 대한 친절, 가족에게 짜증을 내지 않으려는 노력, 약한 사람 앞에서 멈칫하는 마음 같은 사소한 장면들이 한 사람의 인상을 이룬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 /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 식당은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 주문한 음식이 늦어지고 / 친구는 여종업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 / 무시를 당한 여종업원은 /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 난 지금 그 친구의 무덤 앞에 서 있다 / 식당에서 함께 식사한 것이 / 불과 한 달 전이었는데 / 그는 이미 땅속에 누워있다 / 그런데 그 10분 때문에 그토록 화를 내다니. (막스 에르만, '한 친구에 대해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소비자는 왕’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비스에 조금만 불만이 있으면 종사자들에게 갑질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인은 친구의 그런 언행을 물끄러미 (어쩌면 민망해하면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짐작컨대 친구는 평소에도 조금만 심기가 거슬리면 역정을 내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친구의 무덤 앞에서 시인은 묻고 있다. 친구여, 자네가 한 달 후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그렇게 화를 냈겠는가? 많은 이들이 자네를 걸핏하면 성질을 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것이기도 하다. 분노 같은 감정 조절만이 아니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려 할 때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한 달 후에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러한 언행을 선택할 것인가? 그 순간 내가 보여준 모습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된다고 생각하면 다르게 처신하지 않을까?
인간의 어리석음은 인생의 덧없음을 너무 쉽게 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모두 지구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 또는 순례자일 뿐인데, 영주처럼 일정한 영토를 소유하고 거기에서 위세를 부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가장 확실한 미래는 죽음이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는 전혀 불확실하다. 따라서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한없는 은총이요, 경이로운 기적이다. 그 점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매사에 지혜롭게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지혜
인간이 어리석고 추악해지는 한 가지 중대한 이유는 불멸에 대한 환상이 아닐까 싶다. 죽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억누르거나 회피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붙들려 한다. 죽음의 공포를 외면할수록 우리는 젊음, 재산, 지위, 명성 같은 것들에 필요 이상으로 매달린다. 그것들은 삶을 풍요롭게 할 수는 있지만, 죽음의 불안을 완전히 씻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유한성을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우리는 덜 중요한 것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 소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미국에는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소박한 일상의 전통을 300년 동안 이어가는 <아미쉬>라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들의 경험을 여러 편의 에세이로 담아낸 책 『간소한 삶』 (스콧 새비지 엮음)에서 한 구절을 꺼내 읽어본다.
“그래도 사랑은 죽음을 대면하고 받아들이고 죽음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죽음을 대면할 때만 지상의 사랑은 자신의 진정한 크기를, 자신의 불멸성을 알게 된다. 건강을 어리석게 정의하지 않으려면 그 정의 속에 반드시 죽음을 포함시켜야 한다. 사랑의 세계는 죽음을 끌어안고, 죽음으로 고통받고, 죽음 너머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효율성의 세계는 결국 죽음에 패배한다. 죽음의 순간, 모든 기계와 시술은 멈춘다. 사랑의 세계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사랑의 불멸을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슬픔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성서는 말한다. (요한일서 4:18). 우리가 살아가면서 베풀고 나눈 사랑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고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당사자들이 죽는다 해도, 그 에너지는 밝고 맑은 기운으로 퍼져나가 세상 곳곳에 스며들 것이다. 그 무한한 힘에 접속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오히려 죽음은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거울이 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죽음은 삶이 가능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삶을 품위 있게 마무리하는 웰다잉은 죽음의 순간에 갑자기 완성되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조금씩 연습되는 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웰다잉에는 현실적인 준비도 필요하다. 연명의료에 대한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일, 호스피스와 장례 방식에 대해 가족과 이야기하는 일, 남겨질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두는 일도 죽음을 품위 있게 맞이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모든 준비의 바탕에 질문 하나를 깔아놓을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오래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살 것인가.
오늘 내가 건네는 말, 오늘 내가 참아낸 분노, 오늘 내가 나눈 사랑이 언젠가 나의 마지막 얼굴이 된다. 죽음을 자주 떠올린다고 해서 삶이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에서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가 명료해진다. 웰다잉은 마지막 순간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포장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날의 삶을 다시 배열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영화에 나오는 특수 장치 같은 것이 없이도 매 순간의 언행으로 스스로의 추도 영상을 찍고 있는 셈이다.
김찬호 대학교수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대안교육센터와 하자센터 부센터장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모멸감》(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생애의 발견》, 《유머니즘》,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 등이 있고, 번역서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냈다. 문화인류학을 바탕으로 대안교육, 노년의 삶 등 다양한 주제의 대중 강연을 펼치고 있으며, 대학 밖의 사람들과 인문학적 글로 소통하는 것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