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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7

개념미술? 어렵지 않아요



평범한 것도 다르게 생각하는 힘. 예술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흔히 ‘개념미술’은 어렵다 여기곤 하지만, 알고보면 예술가의 시각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7월은 화가 라이언 갠더 전을 통해 타고난 이야기꾼의 유머를 느껴보자.


마곡에 위치한 스페이스K 서울에서 라이언 갠더의 개인전 <변화율(The Rates of Change)>(~9.17)이 열리고 있다. 스페이스K 서울은 바로 전 마이애미 출신의 젊은 페인터 헤르난 바스의 전시로 큰 인기몰이를 한 곳. 이번 전시에서는 일상적인 사물에서 스토리텔링을 창조하는 라이언 갠더의 블랙 유머에 관객들이 다시 한번 열광할 것 같다. 어렸을 적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반에서 인기 있던 친구들의 공통점은 바로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니었나 싶다. 같은 걸 보고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시각과 생각을 더해 재미나게 각색해 전달하는 친구들. 나 또한 늘 그런 친구를 부러워했고, 옆에 두고 싶어했다. 누구에겐 평범한 사물이지만, 어떤 이에겐 한없이 좋은 이야기 거리를 담고 있는 사물. 마흔 여섯의 라이언 갠더(Ryan Gander)는 평범한 걸 보고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눈과 머리를 가진 개념미술작가다. 더욱 대단한 건 그 창작물이 회화부터 사진, 설치, 조각,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여러 매체를 구사한다는 것. 이번 전시에도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작품 28점이 전시장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라이언 갠더의 <변화율> 전시 전경.



루프탑에 설치된 ‘우리의 긴 점선(또는 37년 전)’.


영국 출신의 라이언 갠더의 이름이 세계 미술계에 알려진 건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와 이듬해 카셀도큐멘타에서 잇단 주목을 받으면서 부터다. 그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지고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볼 때 어떤 점을 읽어내는지를 듣고 싶어 하는 작가다. 작가 스스로도 “저에게 있어 좋은 예술이란, 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수 많은 종점에서 끝나는 예술을 말합니다. 그 수 많은 종점이란 작품을 감상하는 수많은 관람객을 말합니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개인이 각자 받은 교육,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국적, 언어, 습관 등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나쁜 예술이란, ‘주어진 예술, 똑같은 예술’을 말한다. 일상 사물들이 내포하고 있는 단서, 기호, 상징 등을 토대로 개념을 유추하는 라이언 갠더는 이번에도 확실한 정답을 관객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작품 자체를 해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마음껏 상상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고난 스토리텔러 라이언 갠더가 이번 전시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무엇일까?



전시장 전경. 사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까만 풍선이 천정에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좌)들고 있던 아이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처럼 보이는 작품 ‘움직이는 오브제, 또는 의도’. (우)8살의 라이언 갠더가 쓴 편지 ‘젊은 작가에게’.


우선 위 사진에 담긴 넓은 전시장 사진을 보라. 총 몇 개의 작품이 보이는가? 고양이 좌대 설치작품 네 개와 의자를 전복시킨 작품 한 개, 평면 작품 두 개가 눈에 먼저 들어오겠지만 당신은 저 천장에 외로이 붙어있는 검은색 풍선을 놓치면 안 된다. ‘모든 종류의 0보다 257도 낮은 온도’라는 제목의 이 풍선은 헬륨 풍선을 띄운 것처럼 보이지만 고광택 유리 섬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과 함께 유심히 관찰해야 할 작품이 또 한 개 있는데 바로 미술관 2층 작은 공간에 설치된 ‘움직이는 오브제, 또는 의도’. 보통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은 녹아 액체가 되지만 라이언 갠더의 아이스크림은 견고하고 무거운 청동 채색 조각이다. 풍선과 아이스크림 등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 평범한 사물에 대한 상식과 사고를 전복하고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부여하는 그의 방식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작품들이다. 풍선과 아이스크림처럼 유년 시절의 기억과 상실감을 주제로 한 작품 ‘젊은 작가에게’는 여덟 살 시절의 자신을 젊은 예술가로 상상하며 써 내려간 편지를 구겨 전시장 바닥에 연출한 것. 가까이 가야 편지의 텍스트가 보이기에 관객은 작품 앞에 쪼그리고 앉을 수 밖에 없다. 라이언 갠더는 이처럼 새로운 창작이 아닌 우리 삶에서 발견된 물건을 무심하게 배치해 관객을 작품에 끌어들인 후 그것을 관조하게 만든다.


일상 사물과 레디메이드의 경계를 넘나드는 2020년 작 ‘어디에나 울리는 우리의 메아리 (현존의 여파)’.


라이언 갠더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시간과 관련된 일상 사물과 레디메이드 제품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에선 진흙이 잔뜩 묻은 운동화가 그것이다. ‘어디에나 울리는 우리의 메아리(현존의 여파)’라는 이 작품은 백라이트가 설치된 커다란 빌보드 속에 놓인 운동화다. 정확히 말하면 ‘가짜 진흙이 묻은 아디다스 운동화’다. 도쿄의 아디다스 오리지널이 만들고 판매하는 공식 제품인 이 레디메이드 운동화에 담은 라이언 갠더의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다. 2017년 9월에 멕시코 시티에 끔찍한 지진이 났을 당시, 오마르 루발카바라는 인물은 무너진 건물 더미를 탈출해 다른 생존자들을 찾아 수색했는데, 바로 그날 신고 있던 운동화가 바로 이것이다. 오마르 루발카바는 그 일 이후 이 운동화를 갠더에게 선물했고, 갠더는 가짜 진흙을 만들어 디자인(!)한 후 운동화를 촬영했다. 가짜 진흙이 묻은 이 운동화를 누군가 신고 돌아다니는 순간 이 운동화에는 실제 흙이 묻게 되고, 그렇게 ‘레디메이드’라는 개념과 그가 디자인한 ‘작품’이라는 개념이 뒤섞여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것을 갠더는 알려주고 있다.



쌓인 눈을 형상화한 ‘몇 인치의 눈이 쌓인, 뒤집힌 브로이어 의자’.


라이언 갠더는 어떤 사건이나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위의 작품처럼 의자에 눈을 쌓아 놓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디자인사에 남다른 의미를 갖는 유명 의자를 등장시켜 그 위에 쌓인 눈을 연출한 ‘몇 인치의 눈이 쌓인, 뒤집힌 브로이어 의자’와 ‘눈 내린 오후 뒤집힌 르 코르뷔지에 의자’에는 의자가 넘어지기 이전 혹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대한 상상을 유발한다. 이 두 작품엔 시간의 흐름이 의자 프레임에 두껍게 쌓인 눈가루로 나타나고 있는데 실제 이 눈은 대리석 수지로 만든 것이라고. 디자인사를 대표하는 값비싼 의자들을 쓰러뜨린 행위, 그리고 쓰러진 채 많은 눈을 맞고 있는 의자의 모습이 마치 ‘영원한 왕좌, 영원한 승리자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따뜻하니 노곤하다, 또는 불법 거주자들(고양이 스모키가 조각가 조나단 몽크의 <풀 죽은 조각 2(2009)>를 만났을 때)’.



전시장 곳곳에 놓인 고양이 작품은 예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스토리텔러적 성격을 띤 그의 작품은 마지막으로 고양이와 좌대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실제 살아있는 것 같이 정교하게 만든 고양이와 각기 다른 모양의 좌대는 하나의 세트로, 이번 전시에 다수 설치되어 있다. 갠더가 사용한 좌대는 에바 헤세 (Eva Hesse)와 수잔 힐러 (Susan Hiller), 브루스 맥클린 (Bruce McLean), 조나단 몽크 (Jonathan Monk)와 같은 현대의 주요 조각가의 논쟁적인 작품들이 놓였던 좌대를 그대로 본뜬 것. 갠더는 그 위에 모형 고양이를 배치하고 모든 좌대의 출처와 고양이 이름을 작품의 제목에서 서술형으로 길게 풀어냈다. 대단한 현대미술작품이 아닌, 길고양이 로티와 타이거, 삭스, 스모키가 작품의 좌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이 모양새를 통해 갠더는 “예술은 대단한 것이 아니며 우린 누구나 저마다의 창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유머러스하게 어필하고 있다.


사진제공 스페이스K서울

김이신 <아트 나우> 편집장

<아트 나우> 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