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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0

나이 말고 그림을 보세요, <Hullo Hullo, Following on: 로즈 와일리>



영국 작가 로즈 와일리Rose Wylie의 개인전이 한가람 미술관에서 3월 28일까지 열린다. 마치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처럼, 그녀의 작품은 우리 눈앞에서 때론 위트있게, 때론 희망을 이야기하며 관객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Joe McGorty


1월 초 방문한 한가람 미술관 제1, 2전시실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 관객이 유독 많았다. 방학 기간에 친구나 부모님, 그리고 미술 선생님과 이곳을 찾은 듯했다. 아이들은 설명에 귀 기울이거나, 노트에 그림을 모사하거나, 마음 가는 작품을 골라 혼자만의 동선으로 돌아다니는 등 자유롭게 작품을 감상했다. 아이들이 온전히 즐기는 전시의 특징은 바로 작품의 가독성과 정확성이 좋다는 것. 로즈 와일리의 작품 또한 ‘쉽게 잘 읽힌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그것의 힘은 주제에 집착하지 않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로즈 와일리만의 철학에서 온다.


Korean Children Singing. 2013, Oil on Canvas, 182 x 250㎝ ©Soon-Hak Kwon


Black Cat and Black Bird. 2020, Oil on Canvas, 183 x 160.5㎝ ©Jo Moon Price


Red Twink and Ivy. 2002, Oil on Canvas, 183 x 504㎝ ©Soon-Hak Kwon

이번 전시는 총 7개 관으로 구성됐다. 로즈 와일리 주변 일상의 순간을 모은 1관 ‘보통의 시간’,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모은 2관 ‘필름 노트’, VIP만 입장이 가능한 테이트모던 룸 속 특별 전시작을 전시한 3관 ‘테이트모던의 VIP룸’, 역사 속 이야기와 뉴스를 그림 4관 ‘영감의 아카이브’, 생명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설치된 5관 ‘살아있는 아름다움’, 토트넘을 그린 6관 ‘축구를 사랑한 그녀 그리고 손흥민’, 소녀의 다양한 모습과 자화상이 모인 7관 ‘소녀, 소녀를 만나다’, 여기에 권순학 작가가 재현한 로즈 와일리의 아틀리에를 볼 수 있는 특별관 ‘아틀리에’까지. 이번 전시는 상당한 규모로 회고전을 방불케 했다.



3관 ‘테이트모던의 VIP룸’에 설치된 Hullo, Hullo, Following-on




7관 ‘소녀, 소녀를 만나다’에 걸린 Black Frock, the Modest Corset(Malevich). 2019, Oil on Canvas, 183 x 312㎝ ©Jo Moon Price


특별관 ‘아틀리에’ 전경


로즈 와일리는 미술계에 75세가 되어서 데뷔한, 늦둥이 신인이었다. 하지만 데뷔와 동시에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예술 애호가들의 눈을 사로잡으며, 87세가 된 올해까지도 그 어떤 작가보다 왕성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영국 남동부 켄트의 시골 마을에서 40년 넘게 거주한 그녀는 나무와 산딸기로 가득한 자신의 낡은 집과 정원에 머물기를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영감은 자연스레 일상생활이나 주변 환경으로부터 온다. 매일 듣는 뉴스와 역사, 만화, 스포츠, 유명인, 자연과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 이 모든 것이 로즈 와일리의 붓끝에서 새로운 비주얼로 탄생한다.



Son. 2020, Coloured Pencil, Biro and Collage on Paper, 40.7 x 26.3㎝ ©Jo Moon Price



One to watch, Son. 2020, Coloured Pencil, Pencil, Oil and Collage on Paper, 30.4 x 37㎝ ©Jo Moon Price 



주변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작가는 많지만, 로즈 와일리는 이를 직관적으로 그려낸다는 특징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는 관객 또한 나무로, 코끼리는 코끼리로, 소녀는 보통의 소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텍스트도 같은 맥락이다. 즉 로즈 와일리는 오해의 소지 없이 메시지와 감성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만약 전시장을 찾는다면 가급적 캔버스에 쓰인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작가가 관찰한 인물과 사물의 특정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큰 장치이기 때문이다.


Queen of Pansies(Dots). 2016, Oil on Canvas, 183 x 331㎝ ©Soon-Hak Kwon
 


Blue, Girls, Cloths I wore. 2019, Oil on Canvas, 183.5 x 325.5㎝ ©Jo Moon Price 



Red Painting Bird, Lemur & Elephant. 2016, Oil on Canvas, 183 x 499㎝ ©Soon-Hak Kwon


아마 작가에게 “왜 인물 앞에 선인장을 그렸나요?”라고 묻는다면,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제가 그저 선인장을 좋아하기 때문이죠”라고 답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미술 작품 안에서 심오한 철학이나 정치적 이견, 사회적 비판의 메시지를 찾지만, 로즈 와일리에게 작품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 그리고 정치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의미한다. 다른 문화영역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그녀의 필름노트 작업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쿠엔틴 타란티노, 베르너 헤어초크, 벨라타르 등 평소 존경하는 감독들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많이 선보이고 있다. 설령 그녀가 군복 입은 군인을 묘사했다고 해도, 정치적인 메시지로 오해하지 말기를. 이는 어디까지나 존경하는 감독들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현이자 오마주일 뿐이다. 실제로 그녀는 “내 작품 앞에서 정치적, 인종적 해석을 하는 것을 보면 그저 재미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Sitting on a Bench With Border(Film Notes). 2008, Oil on Canvas, 282 x 242㎝ ©Soon-Hak Kwon

Julieta(Film Notes). 2016, Oil on Canvas, 206 x 500㎝ ©Soon-Hak Kwon

6관 ‘축구를 사랑한 그녀 그리고 손흥민’ 전시실에는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구단에 대한 오마주가 담겨있다. 로즈 와일리는 축구 마니아였던 남편의 영향으로 리버풀, 첼시, 아스널 등 여러 구단을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특히 그녀는 한국인에게 익숙한 토트넘의 오랜 팬인데, 이번 전시에서는 토트넘 선수들과 손흥민에 대한 그림을 여럿 출품해 각별한 애정을 과시하며 축구 팬들의 발길을 모았다. 혹시 오해할 수 있으나 그녀는 사실 셀러브러티 자체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대중적인 아이콘을 작품 소재로 사용해 많은 관객과 공유하고 싶을 뿐. 이렇듯 로즈 와일리는 공공현상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관심이 많다. 

 6관 전경

 
 Tottenham colours, 4 goals. 2020. Oil and Collage on Paper and Canvas, 111.5 x 89㎝ ©Jo Moon Price

비록 늦은 나이에 전업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영국에서 가장 성실한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로즈 와일리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예술혼을 불사르고 있다. 특히 대작에 대한 강한 집념을 보이는데, 갤러리가 ‘제발 사이즈가 작은 작품을 그려달라’고 사정할 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열정과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그녀의 전시에서 관객은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제공 UNC


김이신 <아트 나우>편집장

<아트 나우>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