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문의031-645-9191

에덴 미디어

컬처
2020-12-07

친히 낮은 곳에 임하는, 외면당한 현대판 성자 <행복한 라짜로>



어느덧 한 해의 끝을 맞이하고 있다. 매해 12월은 저마다의 마음속 각기 다른 상념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기다. 성큼 다가온 기말고사, 몰려버린 업무 홍수에 나지막이 내뱉는 한숨이 있는 반면 연말연시의 만남에 대한 설렘과 기쁨도 12월 하늘을 가득 장식한다. 특히 12월은 크리스마스를 빼놓을 수 없다. 인류의 역사 속 아기 예수의 탄생기념일은 비기독교인에게도 소중한 이들을 기억하고 뜻깊은 관계를 맺는 시간을 선사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12월이 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보석 같은 영화 <행복한 라짜로>를 소개한다. 이 감격스러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낮은 자로 이 땅에 내려와 말 구유에 놓였던, 아기 예수를 묵상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라며.


<행복한 라짜로>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목가적인 도시, 이탈리아의 ‘인비올라타’
<행복한 라짜로>는 2018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제작된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영화이다. 칸 영화제 각본상 및 시카고 국제영화제,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그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사랑받는 이유는 난해하지 않고, 철저하게 대중의 공감을 자아내면서 각자만이 할 수 있는 깊은 사유의 시간으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작과 동시에 눈 앞에 펼쳐지는 목가적인 풍경의 아름다움 역시 이 영화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에서 소작 일을 돕는 라짜로는 이웃들과 함께 몰락한 후작 부인의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청년이다. 인부들의 모든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그는 요양 차 시골로 온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디와 가까워진다. 어느 날 탄크레디가 꾸민 자작극으로 인해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이 과정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진 라짜로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다시 깨어나게 되는데 이미 세상은 라짜로가 알고 있던 그 세상이 아니다. 걷고 또 걸어 도시로 향하는 라짜로는 거기서 헤어진 이웃들을 다시 만나게 되고 또다시 그들의 허드렛일을 돕는다.


탄크레디(왼쪽)와 나짜로. 출처: 네이버 영화
부활한 라짜로는 황량한 도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출처: 네이버 영화


마술과도 같은, 하지만 냉혹한 현실과 맞닿은 이곳

영화는 시작부터 중반부까지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의 풍광을 보여준다.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부는 수확기의 건조한 바람 소리, 가축들이 내는 높고 낮은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따스한 감성. 배경음악이 없더라도 고요함 그 자체가 지닌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자연풍경이다 보니, 이것이 실제인지 아니면 만들어진 환상인지 순간 당황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런 표현 기법에 대해 영화 연구자들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하는데 이는 환상과 현실이 함께 공존하는 방식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리얼리즘)을 집단의 우위, 수직관계로 점철된 계급사회로 보고, 환상(마술)은 계급에서 파생된 약자와 소수를 의미한다고 가정해볼 때, 이런 마술적 리얼리즘의 표현방식은 일상화되어버린 계급사회의 현실과 그 안에서 부당함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라짜로의 부활이라는 마술을 접목한 것이다. 이는 아름다운 풍광이 한순간에 잔인한 현실이 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현대판 성자, 라짜로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라짜로는 누구일까? 후작 부인의 일을 돕는 그 지역 공동체는 혈연공동체이자 더불어 지연 공동체이다. 후작 부인이라는 상위계급과 그 아래 계급인 소작인들의 공동체. 그러나 그 안에서도 또다시 계급이 나누어진다. 낮은 자 중에 가장 낮은 자. 바로 라짜로다. 공동체의 온갖 궂은일, 다들 귀찮아하는 일, 미루고 싶은 책임, 천하다고 치부되는 일들은 모두 라짜로의 몫이다. 어디에도 이 계급 피라미드의 연결고리를 건네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제목부터 <행복한 라짜로> 인 것처럼, 라짜로는 이 모든 일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이들 곁에 있다. 오로지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 마냥, 그의 얼굴을 너무나도 순수하고 투명하다. 이름에서도 눈치챌 수 있지만 라짜로는 성경에 등장하는 나사로를 떠올리게 한다. 한 명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형제 나사로이고 또 한 명은 나사렛 예수, 즉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은 두 인물이 모두 죽었다 살아났음을 언급한다. 놀랍게도 이 영화의 라짜로 역시 죽음에서 다시 생을 맞이한다.





















라짜로의 부활은 성경 속 여러 인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는 과연 성자를 알아볼 수 있을까

라짜로의 극 중 부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십수 년이 지났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라짜로를 제외하고 다들 노쇠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변화고 사람이 변해도 이들 간의 수직관계는 변한 것이 하나 없다. 부활한 라짜로는 처음에만 추앙받을 뿐 여전히 그들 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해낸다. 그렇다면 도대체 라짜로는 왜 부활한 것일까? 영화 후반부 라짜로는 그리워하던 친구 탄크레디를 만난다. 그제야 비로소 입을 연다. “너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라고.



출처: 네이버 영화


탄크레디는 기억조차 못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초월해 겉옷 하나 없이 냉랭한 도시로 걸어 들어 온 라짜로. 그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고 돌아와 예전처럼 순수하게 탄크레디 앞에 서 있던 라짜로의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계속해서 짓밟히고 소외될 것을 알면서도 부활을 선택한 라짜로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약속 그 자체가 아닌, 그 약속을 함께 나눈 자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었던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라짜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말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하찮은 약속과 하찮은 인간. 그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현실사회에 현현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성자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어쩌면 별 생각 없이 내칠 것이다”


현대판 성자는 누구인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가장 허름한 곳에 누워, 고통받는 이의 곁에서 함께 애통해 하는 자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는 누구를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들 앞에 서 있는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