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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6

평온의 시간, 김창열의 <the Path-더 패스>전



‘물방울 작가’ 김창열이 2013년, 화업 5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개인전 이후 7년 만에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0월 23일부터 11월 29일까지 진행하는 이번 전시에서 관객들은 영롱하고 찬란한 물방울 뒤에 숨겨진 ‘문자’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1929년생인 김창열 작가는 한국 화단의 거장에 속한다.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6세에 월남한 그는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27살이던 1957년에는 동료 작가들과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해 한국의 앵포르멜Imformel 운동*을 이끌었다.


*정형화되고 계획된 구성을 거부하고 자발적,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표현주의적 추상미술 운동



김창열 작가. ‘물방울 작가’로 잘 알려진 한국 화단의 거목이다.

당시 유럽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앵포르멜 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정신적 허무감과 방황 속에서 시대를 고민한 유럽의 젊은이들처럼 한국전쟁을 절실하게 체험한 김창열 작가와 주변 또래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세대적 공감대에서 앵포르멜 미술 운동은 우리의 현대미술 운동으로 재탄생했고, 이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한국 화단에서 김창열 작가의 존재감은 마치 아버지와도 같다.


Recurrence PBL08007(2008) Acrylic and oil on canvas.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선보인 ‘해체’ 연작. 온전한 글자가 ‘해체’되어 의미 없는 기본 획이나 캔버스에 스민 물감 자국과 같은 문자의 흔적들이 화면에 등장한다.

김창열 작가의 예술적 DNA는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마을의 대지주였던 할아버지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필가로, 다섯 살도 되지 않은 김창열에게 먹을 가는 방법, 붓을 잡고 획을 긋는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할아버지에게 글씨의 균형과 비율을 배운 그는 자연스럽게 조형 감각을 습득해갔다.
김창열 작가가 물방울을 처음 그린 건 파리에서다. 그 전 김환기의 소개로 뉴욕에 머무르며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판화 공부를 하며 작가로서의 꿈을 키웠지만, 당시 뉴욕은 잭슨 플록, 앤디 워홀 등 팝 아티스트들이 활개를 치던 상황이었다. 백남준의 도움으로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주류가 아니었던 그는 더 뉴욕에 머무를 이유를 찾지 못하고 프랑스로 건너간다.


김창열 작가의 젊은 시절

낡은 마구간에 아틀리에와 숙소를 마련하고 캔버스를 재활용해가며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아침, 그는 전날 캔버스에 뿌려놓은 물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 장면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물방울 그림의 기원이자 시초다. 이후로 지금까지 김창열 작가는 흘러내리는 물방울, 천자문 위에 얹힌 물방울, 신문 위의 물방울 등 무한한 변주를 창조해 냈다.


Recurrence(1987). Oil on canvas

이번 전은 갤러리현대와 김창열이 함께하는 열네 번째 개인전으로 문자와 물방울이 만난 그의 대표작 3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갤러리현대 1층에 설치한 1975년작 ‘휘가로지’다. 물방울과 문자를 최초로 결합한 그림으로 신문 1면에 수채 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린 이 작품은 캔버스에 환영으로만 존재하던 물방울을 현실 세계로 옮겨 왔다는 특징이 있다. 작가는 당시 물방울의 특징을 강조한 빛의 반사 효과를 주요 조형 요소로 삼았다.

Le Figaro(1975). Watercolor on newspaper

1976년, ‘신비로운 물방울’을 가지고 귀국한 그는 현대화랑과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국내외에서 꾸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2004년 파리의 주드폼 국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갖기도 했는데, 당시 전시는 주드폼 국립미술관이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변경되기 전 마지막으로 선택한 전시라 더욱 의미가 크다. 이듬해인 2005년에는 베이징 중국 국가 박물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지며 전 세계를 대표하는 물방울 작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사실 물방울로 인해 확대된 한자나 신문 타이포그래피 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의 작품을 절반만 감상한 것이 된다. 작가에게 문자는 이미지와 문자, 과정과 형식, 내용과 콘셉트, 동양과 서양, 추상과 구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미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Recurrence SH100023(2010)(왼쪽)과 Recurrence SH100026(2010)

“한자는 끝없이 울리고 끝없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맨 처음 배운 글자이기 때문에 내게 감회가 깊은 천자문은 물방울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_김창열,1998


Recurrence PA1991(1991). Ink and oil on canvas. 작가는 ‘회귀’ 연작에서 날짜, 계절, 시간, 농사 등 세상의 이치가 담긴 천자문을 깨치던 시절로 돌아가 창작을 통해 진리를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Recurrence NSI91001-91(1991). Ink and oil on canvas. 우주와 자연, 인간 삶의 이치 등을 담은 125편의 고시로 오른쪽 귀퉁이부터 균일한 자간과 행간으로 꼼꼼히 적혀있다.

그의 말처럼 1990년대 이후 작업의 양상을 대표하는 ‘회귀’ 연작은, 문자와 이미지의 대비를 넘어 음양의 조화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생명과 순수, 정화를 상징하는 물방울과 결합한 문자를 멀찍이 마주한 채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그 안에 담긴 묵직함이 전달된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 많은 전시장을 찾지 못하지만, 김창열 작가는 80대 중반까지도 되도록 많은 전시를 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간 국내 주요 전시 오프닝 행사에서 심심히 않게 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노령의 작가가 힘닿는 데까지 다른 전시를 보러 다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극을 받기 위해서’라고. 몇 해 전 한 행사장에서 만난 그는 “다른 작가가 보여주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열정을 보다 보면 내 일에 대한 자세도 다시 가다듬게 된다”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의 성실함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제작한 ‘회귀’ 연작 일부가 먹과 한지를 소재로 한 작업으로 확장된 것과도 연관이 있다.


Recurrence NSI91004-90(1990). Ink and acrylic on Korean paper mounted on canvas.


Recurrence ECH89005(1989). Ink and acrylic on Korean paper mounted on canvas. 작가는 동양적인 조형 공간의 합일을 이루어내기 위해 재료의 사용에도 연구를 거듭했다. 위 작품들은 종이에 글자 쓰기를 연습하듯 한지를 캔버스에 부착하고 천자문을 반복적으로 겹쳐 쓴 것이다.


Recurrence PK91003(1991) Ink and acrylic oon Korean paper mounted on canvas. 한지에 먹으로 선을 겹겹이 교차 시켜 문자의 층을 만든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한자를 무수히 여러 번 반복해 그리다 보면 점점 색이 탁해지거나 어둡게 가라앉을만한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신기하기 때문이다.

한자 위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물방울로 가득한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수년 전 한 식사 자리에서 “파리의 마구간에 살며 어느 날 아침 우연히 물방울을 발견했던 시기가 가장 고생했던 시기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추억하며 웃던 김창열 작가의 헛헛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가 어릴 적 대동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물장구를 치던 그 시절의 동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전 전시장 전경.

사진 제공 갤러리 현대

김이신 <아트 나우>편집장

<아트 나우>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