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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에세이
2020-10-12

정원 일 하는 ‘우리’를 예찬한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총괄 정원사 알랭 바라통Alain Baraton은 2019년 내한 당시 “정원은 인류 최고의 학교”라고 말한 바 있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세상의 흐름을 보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 정원이라는 학교에서 우리는 조물주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며 또 위로를 받는다.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는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 속에서 정원이 들려주는 가르침에 귀 기울인다.



2020년은 누가 뭐래도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은 긋는 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뜻밖의 적을 만나 인류가 말 그대로 분투 중이니 말이다. 이 싸움의 끝에 인류가 다시 평화로움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과학자들의 예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인류가 누렸던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도 한다. 가끔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를 곱씹게도 하지만, 인류에게 이런 시련이 올 수 있다는 예측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 지구는 애초부터 인류만의 것이 아니었고, 헤아릴 수도 없는 무한한 생명체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존의 장이다. 이 공존의 의미를 우리가 너무 미약하게 생각하고, 다른 생명체에 대한 존중에 지나칠 정도로 야박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아주 오래전 일도 아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땅 위에 집을 짓고, 그 집 주변에 정원의 형태든, 동산의 형태이든 식물을 포함한 주변 환경을 존중하며 살았다. 영어로 생태를 뜻하는 ecology의 'eco'는 'house' 즉, 집을 말한다. logy가 연구를 뜻하니 결국 생태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살아가는 주거 환경을 연구한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당연히 우리 인간의 집도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2020년 인류에게 불어 닥친 불행 앞에 우리의 주거 환경이 과연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에 대해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10년 전쯤 봤던 어느 SF 영화의 한 장면이다. 도시는 수백 층이 넘는 고층 건물로 가득하다. 우리가 모는 차는 땅 위에서만이 아니라 공중에도 이미 가득 차 있다. 주인공 차량이 건물의 벽을 타고 올라가면 120층에 위치한 집의 주차장으로 자동 진입된다. 문이 열리면 집으로 연결되는데, 어둡게 쳐진 블라인드가 주인의 방문에 맞춰 넓은 초원에 꽃이 만발한 영상으로 바뀐다. 주인공은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낸 뒤, 화면이 만들어낸 초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마침내 지친 하루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다. 당시는 보는 내내 그 상상력에 놀라워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미 실현됐거나, 혹은 그리 멀지 않은 날 우리의 주거는 곧 이렇게 될 것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한 번쯤 생각해보자. 우리 삶의 변화와 발전이 우리를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과연 이게 맞는 것일까? 한 평의 땅도 없이 수백 미터를 공중에 떠서 25평, 45평의 공간에 갇힌 채, 영상으로 자연을 접해야 하는 우리의 주거가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적어도 나와 내 가족은 오래전에 답을 찾은 듯하다.


설악산 밑,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지금 내가 사는 속초 집이 위치해 있다. 200평 남짓한 마당에 수많은 식물이 모여 산다. 올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아 50일도 넘는 길고 긴 장마를 보냈다. 그 와중에 나는 발목을 다쳐 정원 일에는 손도 댈 수가 없었다. 올해 정원은 이렇게 접어야 하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가을에 접어들어 반전이 시작됐다. 다리 깁스를 풀고 조금씩 흐트러진 정원을 정리하다 보니 정원에 작년에 심은 식물들의 씨가 많이 번져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긴 장마에 습도가 적절히 유지되어 싹을 다시 틔우는 데 도움을 준 모양이었다. 코스모스, 헬레니움, 헬리안투스, 흰줄무늬 억새, 수크령, 은쑥, 쑥부쟁이, 구절초, 아스타.... 모진 시간을 견뎌내서인지 올해 유난히 가을꽃이 예쁘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데도 정원에서 일하다 보면 땀이 흐른다. 게다가 가을볕이라고는 해도 얼굴과 손이 까맣게 타버린다. 다리가 아파 내내 집안에만 있을 때는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지 몸조심하라는 말을 인사처럼 들었다. 그런데 가을볕에 그을리니 다들 '건강해 보이시네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나를 조금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자연스럽게 '정원'을 떠올린다. 정원이 무엇을 해주고, 베풀어서가 아니다. 그 정원에서 내가 하는 어떤 행동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원을 예찬하고자 함이 아니라 정원 일을 하는 우리를 예찬한다.

오경아 가든 디자이너

오가든스·오경아의 정원학교 대표. 방송 작가 출신으로 2004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녀는 영국에서 정원 디자인을 공부한 뒤 국내에 정원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인물이다. 가든 디자인 및 정원 관련 글쓰기를 통해 정원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가든 디자인의 발견><정원생활자><안아주는 정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