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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1

지지리 ‘복’도 없는 찬실이표 인생예찬, <찬실이는 복도 많지>



복이란 무엇일까? 좋은 학교에 가고,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 이 또한 축복일 수 있지만, 그게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영화 평론가 장다나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소개하며 진짜 복에 대해 돌이켜보게 만든다. 주인공 찬실의 삶이 여러모로 성경 속 욥을 연상시키기에 이 질문은 더욱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를 처음 만난 건 작년 가을 한 영화제에서였다. 나는 극장 로비에서 별다른 기대 없이 상영 카탈로그를 뒤적이고 있었다. 영화 정보를 찾아 꼼꼼하게 러닝타임을 체크하는 친구를 옆에 둔 채, 잡지 이미지라도 훑어보듯 적당히 제목 정도만 스캔하고 넘기길 반복했다. 그렇다고 영화 보기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줄거리 위주로 영화를 선정했다가 수면만 불러오는 쓰디쓴 실패를 맛본 근 며칠을 경험한 후, 나름 가벼운 나만의 방식을 활용하는 중이었다. 때로 영화는 제목만으로도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많.지.”
눈으로 읽고, 또 소리 내어 읽어봐도 참 기분 좋은 제목이다. 무의식중 하얗고 토실한 대감 집 며느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찬실이라는 다정한 이름을 가진 처자가 고운 한복을 입고 생긋 웃는 얼굴, 무엇보다 ‘복’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한국적 정서를 떠올리며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가 들려주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상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영화는 찬실이 함께 작업하던 감독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문을 연다. 오프닝부터 툭 던져진 이 당황스러운 사건은 어느 순간 눈 무더기가 되어 거침없이 굴러가기 시작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찬실은 퀭한 얼굴로 시종일관 스크린을 서성이기 시작한다. 돈 없고, 일도 없고, 나이도 많고, 고백도 거절당하고 이제는 헛것까지 보이는 그야말로 ‘지지리도 박복한’ 모습을 한 채로 말이다. 찬실의 복, 아니 복의 부스러기라도 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내가 우스울 정도로 제목에 단단히 낚였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올해 마흔인 찬실(강말금 분)은 독립영화 프로듀서이다. 직함은 프로듀서지만 정확히 어떤 역할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인지도와 상관없이 영화 작업하는 것 자체가 마냥 좋은 찬실이지만, 함께 작업하던 지감독(서상원 분)이 사망하고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상황이라 급하게 먹고 살 일부터 고민해야 할 처지이다. 한 때 찬실을 한국 영화의 보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제작사 대표마저 등을 돌리고 결국 몇 안 되는 세간살이를 이고 지고 산동네로 이사하게 된 찬실은 친한 여배우 소피(윤승아 분)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을 하며 인생의 바닥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시집은 못가도 좋아하는 영화는 계속 찍고 살 줄 알았는데.”
“와그리 일만하고 살았을꼬.”
백수가 된 찬실의 입에서 한숨처럼 흘러나오는 말들이다. 지감독의 급작스러운 죽음이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 ‘일복’ 넘치는 시절에는 아마 상상도 못 했던 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급작스런 죽음의 사건은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오는 삶의 변곡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대비한다고 한들 다가오는 죽음 앞에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처럼, 급작스런 인생의 위기 또한 그렇지 않은가. 유난히 찬실이 더 막막해 보인 이유는 그 위기라는 것이 조금씩 찾아오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몰아치기 때문이다. 직업을 잃고, 생계를 위협받고, 함께 일했던 몇몇 동료들은 뒤에서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프로듀서가 뭐하는 직업이냐는 주인집 할머니의 물음에 “이제 저도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는 찬실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화 일을 좋아한다고 믿었던 그 굳건한 믿음마저 잃어간다. 이렇게 인생의 동력으로 불리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또 어느 순간 비워지고 또 비워냄을 경험하면서 찬실의 내면은 텅 비어만 간다. “이고 지고 있으면 뭐하나, 비어야 다시 채우지.” 버릴 짐을 정리해 마루로 가져다 놓는 찬실을 향해 집주인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다. 영화를 그만두기로 한 찬실의 마음은 정말 홀가분해졌을까. 그것이 찬실이 바라던 해답이었을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찬실의 내적 변화와 아픔의 시간을 묵묵히 바라보지만, 결코 어둡거나 비관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잠시 멈춰 섰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관계와 성찰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초반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장 마음을 울렸던 장면이 하나 있다. 어느 날 찬실은 아빠의 손편지를 받는다. 슬퍼 말고 용기를 내라는 위로의 말과 함께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빠는 지감독 영화 별로였어. 잠이 많이 왔다.”
우리는 이미 조금씩 알아채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잠이 오는 영화든, 삼류영화든 딸이 좋아하는 일이기에 조용히 뒤에서 응원해 오던 무뚝뚝한 아빠가 던진 한마디, 그리고 곁에서 사랑해주고 응원해주는 한 사람만으로 이미 찬실은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었음을. 결국 몰아치는 위기를 이겨낼 수 있게 하는 것은 바쁜 일상 속 인지하지 못해도 항상 곁에 머무르는 ‘관계’라는 이름일 것이다. 매 순간 딸처럼 찬실을 챙기는 주인집 할머니, 누구보다 찬실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는 소피, 앞으로도 쭉 찬실과 함께 영화 찍고 싶다고 전하는 스태프들과 매 순간 찬실이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끔 도와주는 신비로운 인물 장국영까지. “원래 별거 아닌 게 제일 소중한 거예요” 찬실의 이 말은 어느덧, 우린 모두 이미 충분하게 각자만의 관계로써 ‘복’을 만나왔다는 말로 들린다. 복을 갈구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이미 충분히 주신 복을 떠올려 보게 하는 것, 단연코 이 영화가 지닌 큰 미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매번 지감독의 작품에 참여하다가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기로 결심한 찬실은 버리려 했던 물건을 다시 가지고 들어오며 말한다. 수많은 선택이 놓인 인생인지라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선택하지만, 그 선택만이 전부일 리는 없다. 또 그 선택이 한 가지 길만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삶은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여정으로 완성되는 것일 테니. 그 안에 영화 있고, 가족도 있고 사랑도 있다.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