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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6

그곳에 가면 #1 휴식 같은 하루



우리는 삶을 돌아보거나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많은 일을 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감상하며 전시장을 찾는 것도 그 일부다. 좋은 공간을 살피고 방문하는 일 또한 색다른 기쁨을 선사한다. 공간 라이프스타일 미디어 <브리크brique>의 정지연 편집장은 종교, 문화 및 예술, 역사 등 여러 분야에서 가치 있고 아름다운 공간과 장소들을 골라 소개하는 ‘그곳에 가면’ 시리즈를 선보인다.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 ⓒ이택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쉼’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누구나 한두 개쯤 연상되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향집 앞 개천에서 어릴 적 친구들과 송사리를 잡으며 장난치던 즐거운 추억일 수도 있고, 어느 여행지의 낯선 풍광과 그곳에서 사는 이들의 모습에 마음을 뺏겨 일상에 지친 자신을 위로하던 순간일 수도 있다. 실제로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은 치료 방법 중 하나로 환자들에게 물리적 또는 정신적 여행을 권유한다. 장소와 공간의 전이가 사람에게 주는 휴식의 효과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상과의 ‘적절한 거리 두기’는 심리적 안정과 스트레스의 강도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이번 칼럼은 정서적인 휴식과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것이다. 어려운 건축전문용어는 잠시 미뤄두고 여러 실 사례를 엮어 건축 전문가뿐 아니라 비전문가도 충분히 즐겨 읽을 수 있는 글을 선보이고자 한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여행’을 통해 생활의 소소한 기쁨과 활력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진정한 안식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그 첫 주제 ‘휴식 같은 하루’에서는 반나절만 머물러도 일상에서 벗어나 쉼을 찾을 수 있는 공간들을 소개한다.


낮은 소리로 말하는 ‘나지요네’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 인근에 독채 민박으로 운영 중인 나지요네. 그 이름은 ‘낮은 소리로 비밀스럽게 이야기 하다’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nasillonner)에서 따왔다. 공간은 그 이름을 쏙 빼 닮아 고요하고 차분하다.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 인근 독채 민박 ‘나지요네’ ⓒ이택수


이곳의 주인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뻔한 집은 짓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일상 공간뿐 아니라 쉼의 공간으로써 집의 역할에 대해 고민한 것이다. 이 건축의 간소함은 그러한 고민의 소산이다. 집의 구성은 방 2개, 주방 겸 거실 1개로 지극히 단순하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노출 콘크리트 소재는 나지요네의 단순함을 한결 부각시킨다.


널찍한 통유리창과 노출 콘크리트가 단순함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이택수


대신 안마당과 천청, 툇마루 등을 최대한 확보했다. 자연과 접하는 공간의 면적을 극대화한 것. 먹고, 자고, 씻는 당연한 일상 사이에 마당의 화초에 눈길을 주고, 밤하늘 별과 대화하는 시간을 ‘계획’한 것이다. 복잡한 세상의 아우성 속에서 이 공간은 단순함이 가진 미덕을 속삭인다.



나지요네의 안마당 전경.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은 최소화하고 최대한 자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택수


오늘은 서촌으로 퇴근! 한옥 스테이 ‘누와’

오늘은 서촌으로 퇴근! 한옥 스테이 ‘누와’ 옛 선비들은 최고의 휴식을 ‘와유(臥遊)’라고 불렀다. 누워서 편히 유희를 즐긴다는 의미다. 경복궁 인근 서촌에 자리 잡은 한옥 스테이 누와는 정말 쉬고 싶지만 시간에 쫓기는 이들을 위해 도심 한가운데 마련한 탈출구 같은 공간이다. 면적은 7평 남짓. 결코 넓다고 할 수 없지만, 문을 여는 순간 조선시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을 준다.

서촌에 위치한 한옥스테이 누와 ⓒtexture on texture


누와의 ㄱ자 구조는 수(水)와 목(木), 다도(茶道), 와유의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그야말로 풍류를 위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 곳곳에 배치한 소품들은 이를 더욱 빛내 준다. 낮은 테이블과 다도를 위한 도구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병풍과 호롱불을 모티브로 삼은 조명 등이 그것이다. 낮은 침대와 오픈 욕조 또한 전통과 현대의 적절한 조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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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함이 매력적인 누와 ⓒtexture on texture


요리도 하고 책도 읽는 공간, ‘프로젝트 후암’

이른바 ‘느슨한 커뮤니티의 시대’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관계가 주는 피로함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립의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자 사람들은 다시 관계 맺기에 목말라 하기 시작했다. ‘언택트(untact)’ 비즈니스의 부상과 살롱 문화의 부활이 함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도시공감협동조합이 기획한 ‘프로젝트 후암’은 이런 밀레니얼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남산 자락에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크게 ‘마을아카이빙’과 ‘우리동네 공유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자는 옛스러움과 시간의 가치를 머금은 오랜 주택을 기록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오늘 소개하는 ‘우리동네 공유공간’은 생활 반경을 집에서 동네로 넓힌다. 거주공간으로부터 도보 10분 내에 다양한 공유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프로젝트의 핵심. 원룸 등 개인 생활영역이 협소한 젊은 층에게 인기가 높다.


후암주방. 소규모 모임이 가능한 공유 주방으로 후암시장 근처에 마련했다. ⓒ최진보


현재 후암주방, 후암서재, 후암거실, 후암별채 그리고 후암가록까지 총 5개 공간을 운영 중인데 그 취지에 맞게 모든 공간들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만들었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후암주방은 동네 친구나 연인을 초대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며 후암서재는 조용히 책을 보거나 간단히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커뮤니티 다이닝 바 ‘공집합’을 1층에 둔 후암거실에서는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즐길 수 있고, 후암별채는 도시인을 위한 1인 휴식 공간으로 스테이가 가능하도록 꾸며졌다. 마지막 후암가록은 전시 공간으로 ‘마을아카이빙’을 접할 수 있는 상설 전시 및 기획 전시로 이뤄져 있다. 체험과 휴식을 누리기 위해 항상 먼 곳까지 살필 필요는 없다. 때로는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 더할 나위 없는 쉼을 선사하니까 말이다.


후암별채. 편히 기대 쉬거나 낮잠을 청할 수 있는 공간이다. ⓒ최진보


현대인의 삶은 언제나 숨가쁘고 고단하다. 지친 마음을 달래 줄 위로와 사색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다.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때로는 연결과 소통을 허락하는 장소들은 우리 삶에 새로운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다.

정지연 <브리크brique> 편집장

브리크컴퍼니 설립자, 공간 라이프스타일 미디어 <브리크brique>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정치학사를, 고려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각각 취득했다. 방송 구성작가, 신문기자, 뉴미디어연구소장 등을 거쳐 2017년 6월 브리크컴퍼니를 세웠다. 온오프라인으로 발행하는 <브리크brique>는 도시와 공간, 사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축은 기술이 아니라 삶을 담는 그릇, 삶 그 자체임을 깨달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