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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30

이 그림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㉖

㉖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함부르크 미술관


우리에게 무더운 여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잊게 만든 매콤한 가을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요즘, 그 느낌 그대로의 그림이 생각난다.


유독 짙은 안개와 고독을 머금은 풍경 속, 산 정상에 선 어떤 남자의 뒷모습.


고독이라는 감각을 시각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그림을 찾으라면 그냥, 무조건 처음 떠오르는 그림,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를 떠올리게 된다. 


바위 끝에 홀로 서서 구름과 안개가 춤을 추는 거대한 대자연을 굽어보는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출처 : wikipedia


이 그림은 오늘날 독일 낭만주의의 상징이자 철학적 사색의 정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인간의 고독과 숭고미를 노래한 명작"이라 평가하는데, 그 이면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미술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나면 이 그림은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 친밀한 또 하나의 다른 그림으로 기억되게 될 것이다. 장엄한 척하는 낭만주의 껍데기를 살짝 벗겨내면, 19세기 독일 화단의 기막힌 현실과 화가의 천재적인 연출력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르하르트 폰 퀴겔겐이 그린 프리드리히의 초상화(1808)    출처 : wikipedia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 이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관람객들이(물론 필자도) 가장 먼저 품는 의문은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이며, 저 험준한 산꼭대기에는 도대체 왜 올라갔을까?"라는 점이다.


흔히 화가 자신을 투영한 자화상이거나 자연 앞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꽤나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사연이 숨겨져 있다는 해석도 있다. 미술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그림은 1817~1818년경,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싸웠던 프리드리히 고트하르트 폰 브링켄(Friedrich Gotthard von Brincken)이라는 인물을 기리는 '추모 초상화'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앙투안 장 그로(Antoine-Jean Gros, 1771–1835)의 <아르콜 다리 위의 보나파르트(1801)>    출처 : napoleon-series


다만 그림 속 인물의 신원과 제작 경위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남자가 입고 있는 짙은 녹색 외투 역시 당시 단순한 등산복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프랑스 지배에 저항하며 결성되었던 독일 의용군의 제복을 연상시킨다는 해석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산꼭대기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모습은 단순한 낭만적 방랑자가 아니라,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장교의 넋을 기리고 그의 애국심을 찬양하기 위해 연출된 '기념비적 초상화'로도 읽을 수 있는 셈이다.



바닷가의 수도사(1808-1810)    출처 : smb.museum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저 장엄한 풍경의 비밀이다. 그림을 보면 마치 화가가 거대한 알프스나 거친 산맥의 한 지점에 서서 직접 보고 그린 실경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저 풍경은 지구상 그 어디에도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일명 '조작된 풍경'이다.


프리드리히는 드레스덴 근교의 '작센 스위스' 지역 일대를 수시로 산책하며 바위와 산봉우리들을 스케치했는데, 화실에 돌아와서는 이 스케치들을 자신이 적당히 잘라 붙였다. 남자가 딛고 서 있는 바위는 카이저크로네의 바위를, 뒤편 좌우로 솟아오른 봉우리들은 치르켈슈타인과 로젠베르크 산 등의 지형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 누구나 쉽게 하는 포토샵으로 멋진 산.jpg 사진 서너 장을 다운받아서 그럴듯하게 합성해 놓은 '19세기형 디지털 합성 사진'인 셈이다.



독일 작센 스위스의 카이저크로네와 치르켈슈타인    출처 : wikimedia


화가는 실제 자연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관람객의 턱을 떡 벌어지게 만들기 위해 지형을 완전히 재창조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 위대한 걸작의 소장 이력 역시 기묘하기 짝이 없다. 오늘날 전 세계 미술 교과서와 철학 서적의 표지를 도배하고 있는 이 그림이 19세기 내내 어디서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


1817~1818년경 제작된 이후 오랫동안 소장 이력이 불분명하다가, 1939년 베를린의 한 개인 갤러리에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이후 개인 소장자들의 손을 거쳐 1970년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이 정식으로 구입한 것이다.



함부르크 미술관 전경    출처 : 함부르크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즉, 오늘날의 명성과는 달리 이 걸작이 오랫동안 미술계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 세월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던 이 그림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인류의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아이콘으로 신분 상승을 이뤄낸 여정 자체가 마치 한국의 '오징어 게임' 같은 드라마 그 자체이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재해석한 벽화    출처 : hamburger-kunsthalle


이 거짓말 같은 완벽한 가짜 풍경을 창조해 낸 프리드리히는 당대 미술계에서 대단히 독특하고 별난 고집쟁이였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 그리는 화가는 진정한 화가가 아니다. 화가는 내면의 눈으로 본 것을 화폭에 옮겨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의 작업실은 매우 단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방해가 되는 잡동사니를 거의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눈앞의 풍경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내면의 사색을 거쳐 자신만의 영적 풍경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당시 서양 회화에서 인물의 얼굴을 보여주는 초상화가 일반적이었음을 생각하면, 얼굴을 감추고 등을 완전히 돌려놓은 인물은 독특한 선택이었다.



창가의 여인(1822)    출처 : wikimedia


얼굴도 안 보이는 초상화를 누가 돈 주고 사겠는가?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고집스럽게 인물의 뒤통수만 계속 그렸다. 관람객이 인물의 표정에 정신이 팔리는 대신, 그 인물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거대한 풍경과 시선을 일치시키도록 만들기 위한 고도의 심리적 트릭이었다.


관람객을 강제로 방랑자의 몸속에 들어가 안개 바다를 함께 응시하게 만드는 이 표현은 현대에 이르러 천재적인 관람자 몰입 장치로 재평가받게 되었다.



출처 : actualitte.com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마침내 안착한 함부르크 미술관(Hamburger Kunsthalle)은 독일 북부를 대표하는 예술의 성지다. 함부르크 중앙역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여행자들에게는 땡큐의 위치를 자랑한다. 이 미술관은 붉은 벽돌의 르네상스 양식 본관과 신고전주의 양식의 별관, 그리고 현대 미술을 품은 새하얀 큐브 모양의 모던한 갤러리가 과거와 현재를 완벽하게 연결하고 있다.



현대 미술관(왼쪽)과 함부르크 미술관의 설립 당시 본관    출처 : 함부르크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이곳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은 바로 프리드리히의 또 다른 대표작인 '얼음바다'와의 조우이다. 북극 탐험선이 거대한 빙하에 산산조각 나는 참상을 그린 이 그림 역시 함부르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인간의 고고한 사색을 보여주는 방랑자의 뒷모습과 얼음 파편에 무참히 짓밟힌 인간 문명의 잔해를 함께 감상할 때 느껴지는 서늘한 온도 차는 오직 함부르크 미술관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극적인 감각이다.


함부르크 미술관은 목요일 오후 9시까지 야간 개장하며, 매월 첫째 목요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한 번 가 보시기를 꼭 권한다.



얼음바다(1823년 경)    출처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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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두필 교수

한동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박사과정 수료했다. Paris 소재 CLAP35 Production 대표 감독(CF, Documentary)이며, 저서로는 좋은 광고의 10가지 원칙(시공아트), 아빠와 떠나는 유럽 미술여행(아트북스), 모두가 그녀를 따라 한다(다산북스),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다산북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인의 CF 감독(살림출판사) 등이 있다. 전 세계 미술관 꼼꼼하게 찾아다니기와 매일의 일상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기고 편집해 두는 것이 취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