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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11. 병원에서 마주하는 낯선 이별들
요즘 정기적으로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다닙니다. 같은 날 치료를 받으며 얼굴이 익숙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눈에 익고, 가끔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날 치료를 받으러 왔겠거니 합니다. 몇 주가 지나도 보이지 않으면 묘한 마음이 듭니다. 차마 누구에게 묻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세상을 떠나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병원에 다닌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이별을 조금씩 경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 gettyimagesbank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사실 아버지와 저는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앙금이 있어 슬픔보다는 미움이나 서운함이 먼저 떠오릅니다. 막상 그날이 왔을 때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나는 어떤 마음일까.' 장례를 직접 치러본 적이 없는 저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방송에 종종 얼굴을 보이는 젊은 장례지도사의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병원에 갈 때면 가끔 장례식장을 바라봅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출처 : gettyimagesbank
혼자 떠난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키는 남자
그러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 <스틸 라이프>(2013)가 떠올랐습니다.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이 영화에서 주인공 존 메이는 혼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가족이나 지인을 찾아내고, 연락할 사람이 없으면 장례까지 직접 준비하는 공무원입니다. 그는 고인의 물건을 살피고, 사진을 찾아보고, 좋아했던 음악을 알아냅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장례식에도 홀로 참석합니다.

<스틸 라이프> 포스터 출처 : 네이버 포토
그러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지를 받게 되고, 마지막으로 맡게 된 사람은 바로 자신의 맞은편에 살던 빌리 스토크입니다. 존은 그의 삶을 따라가며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오래 연락이 끊겼던 딸 켈리까지 찾아냅니다. 그러면서 존의 삶에도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호감을 갖게 된 켈리와 차를 마시기로 약속하고, 평생 처음으로 '다음 날'을 기다리게 되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존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마지막 빌리 스토크와 존의 장례식 장면은 다시 봐도 깊은 여운이 느껴집니다.

출처 : 네이버 포토
존 메이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존은 그저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조금 달랐습니다. 존에게는 자신이 기꺼이 감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의 마지막을 끝까지 기억해 주는 일입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존에게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혼자였을까요. 다른 사람의 삶은 그렇게 꼼꼼하게 들여다보면서, 정작 자신의 삶에는 아무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혼자인 것이 편했을 수도 있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이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포토
그래서 켈리와 차를 마시기로 한 약속이 더욱 애틋합니다. 대단한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누군가와 차 한 잔을 마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소박한 약속 하나가 존에게는 삶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놓을 만큼 소중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출처 : 네이버 포토
Still Life
문득 '스틸 라이프'라는 제목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정물화를 뜻한다는 그 단어 말입니다.
영화 속 존은 죽은 사람들의 사진과 물건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찾아갑니다. 멈춰버린 삶의 흔적을 통해, 그 사람이 치열하게 살아 있었던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멈춰버린 삶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삶의 온기이기도 합니다.

출처 : 네이버 포토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데도 나는 왜 미리 장례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장례를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끝내 풀지 못한 관계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 것인가를 생각하는 일이기도 할 테니까요.
언젠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되는 날, 어떤 마음일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슬플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고, 어쩌면 아무 감정도 없을 수 있겠지요.

출처 : gettyimagesbank
다만 요즘 한 가지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를 너무 오랫동안 '나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만 바라본 것은 아닐까. 그 이전에 아버지도 한때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청춘을 살았으며, 나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이었을 텐데. 존 메이가 남겨진 물건 하나를 통해 한 사람의 삶을 다시 들여다봤듯이,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바라본다면,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삶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새롭게 보게 될까요.
음... 참 어렵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Still Life Official Trailer 1 →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