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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문턱에 선 한국과 대만
2026년 1월, 한국은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대만 역시 같은 시기에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겼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에 이 단계를 지나왔다.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고령사회 이후의 국면에 들어섰지만 그 변화를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대만의 초고령사회 담론이 주목되는 이유는 인구 비율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최근 대만 정부 발표와 주요 언론과 학계 논의를 종합해 보면 대만은 고령화를 말할 때 재정 위기나 의료 붕괴, 사회 여러 문제보다 먼저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전면에 둔다.
이는 죽음을 둘러싼 윤리적 선언이 아니라, 일상이 어떻게 유지되고 정비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다. 한국과 일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초고령사회를 통과하고 있는 지금, 대만은 한국과 거의 같은 시점에 이 단계에 진입하면서도 다른 언어와 다른 질문으로 고령화를 다루고 있다. 대만을 살펴보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초고령사회에 들어선 이후 무엇을 먼저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대만은 제도보다 앞서 삶의 구조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예상된 변화’로 다두는 대만
대만은 2025년 말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06%에 도달하며 WHO 기준 초고령사회에 공식 진입했다. 대만 중앙통신(CNA)은 내정부 통계를 인용해 총인구 약 2,330만 명 가운데 467만여 명이 노년층에 속한다고 보도했다. 출생아 수는 10년 연속 감소해 연간 10만 명 수준에 머물렀고, 수도 타이베이는 이미 인구의 약 4분의 1이 65세 이상이다. 이 수치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역시 2026년 초 같은 기준을 넘어섰고, 일본은 이미 30%에 근접해 있다. 그러나 대만의 특징은 고령화를 돌발적 위기가 아니라 이미 예측된 구조 변화로 전제하고 정책을 축적해 왔다는 점이다. 이 인식은 정책 언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초고령사회 진입 발표 직후, 대만 위생복지부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고령화로 인해 의료 체계가 붕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자원의 사전 배치와 건강 증진 중심의 정책 강화”라고 밝혔다. 문제를 병원이 감당해야 할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병원에 이르기 전의 삶에 두겠다는 정책적 선택이다.
대만이 말하는 준비는 의료비 지출을 줄이기 위한 관리 전략에 그치지 않는다. 만성질환의 조기 관리, 지역사회 기반 건강 프로그램, 노년기의 일상 유지가 정책의 전면에 놓인다. 의료는 최후의 자원이며, 가능한 한 늦게 개입해야 할 영역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는 한국에서 오래 논의되어 온 ‘Aging in Place’, 지역사회 통합돌봄, 무한돌봄 정책이 지향해 온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다만 한국의 정책이 ‘돌봄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왔다면, 대만은 그보다 앞선 단계에서 ‘어떤 삶을 유지할 것인가’를 먼저 묻고 있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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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는 앞서 있지만, 일상은 아직
대만은 아시아에서 드물게 환자의 자기결정을 법으로 명확히 보호한 나라다. 2019년 시행된 ‘병인자주권리법’ 1)은 사전의료결정과 연명의료 선택을 제도화했고, 국제 완화의료 단체와 대만 호스피스 기관들은 이 법을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환자 자율 법제 중 하나로 평가해 왔다. 그러나 최근 대만 언론과 학계의 평가는 보다 냉정하다. 연합보(UDN)와 정책 전문 매체들은 사전의료결정을 실제로 문서화한 비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병인자주권리법 제정 과정에 참여한 타이완대(國立臺灣大學) 교수 손샤오즈(孫效智)를 비롯한 웰다잉 연구자들은, “법은 마련됐지만 사전의료돌봄상담(ACP)에 드는 비용과 절차, 접근성 문제가 여전히 큰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비판에서 중요한 점은 방향이다. 대만 언론과 학계의 공통된 진단은 제도가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웰다잉이 아직 일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결정이 권리로 선언되었지만 실제로 결정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시간과 조건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만이 직면한 가장 큰 노인 문제가 드러난다. 결정할 권리는 생겼지만 결정하기는 여전히 어렵다는 것이다. 다수의 대만 노인들은 자연사를 원한다고 말한다. 가족에게 부담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사를 미리 기록했더라도 의료 현장에서 실제 선택으로 연결하는 단계에서 멈추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준비 과정이 개인에게 과도하게 전가된 구조적 결과다. 대만의 사회복지 재단들은 이 상황을 ‘돌봄의 압축’으로 표현한다.
이는 돌봄과 의료 결정이 삶의 과정 속에서 차분히 준비되지 못하고, 질병의 악화나 위기의 순간에 한꺼번에 개인과 가족에게 몰리는 구조를 뜻한다. 이 장면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지역사회 돌봄 체계가 논의되어 왔음에도 여전히 많은 결정이 병원 문 앞에서, 혹은 가족의 급박한 판단에 맡겨지는 현실과 닮아 있다. 돌봄이 필요해지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의료 선택, 가족의 역할 분담, 비용 부담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대만의 위생복지부 출처 : wikipedia
Taiwan News가 보도한 한 재단의 성명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가정과 전문 돌봄 제공자 모두에게 지대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촉구했다. 여기서 말하는 안전망은 단순한 복지 확대가 아니다. 사전의료결정과 돌봄 상담이 병원 이전 단계에서 지역사회 안에서 접근 가능하도록 마련되고 가족이 모든 결정을 떠안지 않도록 공적 조정과 지원이 개입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웰다잉은 개인의 결심뿐 아니라 사회가 준비해야 할 조건으로 제시된다.
한국·일본과 다른 선택, 그리고 우리가 대만에 배워야 할 점
일본은 초고령사회에 가장 먼저 도달했고 의료와 요양 제도를 빠르게 확장해 왔다. 제도는 안정적이지만 노년의 삶은 종종 관리와 표준화의 대상이 된다. 선택은 가능하지만, 선택의 폭은 제도 안에서 제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은 가족 책임이 강한 구조다. 연명의료 결정, 시설 입소, 치료 중단은 위기의 순간에 한꺼번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웰다잉은 여전히 마지막 선택에 가깝고, 준비의 시간은 충분히 확보되지 않는다.
대만은 이 두 나라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 효 문화는 유지되지만, 최근 정책 담론과 학계 논의는 가족이 대신 결정하는 구조에서 당사자와 가족이 함께 미리 합의하는 구조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정책 분석 매체 Taiwan Insight는 대만의 고령 정책을 평가하며, 보호 중심 접근이 노인의 자율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호에서 자율로의 이동, 이것이 대만 담론의 핵심이다.
대만이 보여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웰다잉은 법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돌봄 정책의 확장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으며, 지역사회에서 ‘결정 이전의 시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설계가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자기결정은 선언이 아니라 접근 가능한 과정이어야 한다. 그리고 병원 이전의 삶이 정비되지 않으면, 좋은 죽음은 논의될 수 없다. 자기결정이 가능하려면 결정 이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보 접근성, 비용과 절차의 부담 완화, 의료 현장과 가족 안에서 선택이 존중되는 구조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대만 학계와 정책 담론이 말하는 웰다잉은 바로 이 과정을 사회가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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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초고령사회는 아직 진행 중이다. 제도는 앞서 있지만 생활 속으로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점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대만의 사례가 의미를 갖는 이유는 고령화를 의료 문제로만 축소하지 않고, 삶의 구조와 선택의 조건으로 확장해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고령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대응의 속도가 아니라 준비의 방향이다. 웰다잉은 특정 순간의 선택이 아닌 사회가 일상 속에서 어떤 선택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 우리의 준비는 노년의 삶과 마지막을 동시에 형성한다. 대만이 던지고 있는 이 질문은 이제 한국 사회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돌봄을 얼마나 많이 제공할 것인가가 아닌 선택이 가능해지는 삶을 얼마나 일찍부터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말이다.
1) 병인자주권리법(病人自主權利法, Patient Right to Autonomy Act)
2019년 대만에서 시행된 법으로, 성인이 자신의 연명의료·완화의료 여부를 사전에 결정하고 이를 법적으로 존중받을 권리를 명시했다.
의료진과 가족의 판단보다 환자 본인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반영하도록 규정한 아시아 최초의 포괄적 환자 자기결정권 법제로 평가된다.
참고:
대만 내정부(Ministry of the Interior, Taiwan), Population Statistics, 2025–2026
대만 중앙통신사(CNA), 「台灣正式邁入超高齡社會」 관련 보도
연합보(聯合報, UDN), 병인자주권리법 시행 이후 사전의료결정 참여율 관련 기사
Taiwan News, 대만의 돌봄 부담 및 사회적 안전망 관련 보도
Taiwan Insight, 대만 고령 정책 및 노인 자율성 관련 정책 분석 기사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Taiwan), 고령사회 대응 및 건강 증진 정책 자료
孫效智(Sun, Hsiao-Chih), 생명윤리·환자 자기결정권 관련 연구 및 인터뷰
이정선
동국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연극사와 작품연구를 강의하였다. 이후 숭실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으며, 초고령사회에서 보다 의미있는 인생의 후반기를 보내기 위한 문화예술을 접목한 프로그램과 좋은죽음을 위한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해왔다. 현재는 에덴낙원의 기획실장과 이라이프아카데미의 책임연구원으로서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통합적 복지와 문화적 실천을 기획·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