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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4

이스라엘의 전문가들이 은퇴 후 변방으로 향하는 이유


이스라엘에서 배운 지혜의 유산


㉗ 이스라엘의 전문가들이 은퇴 후 변방으로 향하는 이유


"우리는 이 땅을 건설하고, 또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건설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באנו ארצה לבנות ולהיבנות בה” (Banu artza livnot ulehibanot bah)."


1930년대 이스라엘의 오래된 노래 가사 중 하나인 이 문구는 이스라엘의 개척 정신을 상징하는 노랫말입니다. 이 노래 가사와 같은 정신이 2020년대 이후 은퇴한 시니어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시니어 프로그램 '아누바누(Anu Banu)'라는 시니어 자원봉사 프로그램이 그 주인공입니다.


'아누바누'는 이 노래의 첫 구절인 '우리는 왔습니다'에서 따온 프로그램의 이름으로, 수십 년간 쌓아온 지혜와 전문성을 가방에 담아 이스라엘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하고 소외된 지역으로 1년간 '두 번째 파견'을 떠나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아누바누 프로그램은 이츠하크 에쉬카르(Izhak Eshchar)가 창립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회가 은퇴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주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은퇴자들은 은퇴 후 곧바로 연금 수령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 국가에 기여하는 세대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돌봄을 받아야 할 세대로 치부되곤 합니다. 이에 반해 이츠하크가 주목한 유럽의 노년학에서는 은퇴 이후의 시기를 '제3의 시대', 의존성이 커지는 극노년을 '제4의 시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특히 은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제3의 시대'에 속하는 세대는 단순히 돌봄을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주체로 인식됩니다.



아누바누 공식 사이트의 첫 화면    이미지 출처 : anu-banu.org


이츠하크는 국가 차원의 정책적 시행에 앞서, 풀뿌리 차원에서 먼저 행동함으로써 이스라엘 은퇴자들 사이에 변화를 일으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연금 수령자들이 자신뿐 아니라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아누바누의 핵심은 은퇴자들이 도움이 필요한 지역, 특히 이스라엘의 광야 지역 혹은 북부 국경지대에 1~2년 정도 거주하며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2022년 겨울, 이츠하크를 포함한 다섯 명의 친구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취약 지역인 가자지구 근처를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활동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2024년 말 광야에 위치한 도시 아라드(Arad)에서 다시 재개되었습니다.

아라드 시와의 협의를 통해 봉사자들에게는 무료 주택이 제공되며, 주택을 제외한 생활비와 활동 관련 비용은 봉사자 본인이 부담합니다. 또한 주 20시간 이상 해당 지역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은 정규 및 비정규 교육, 사회복지 서비스, 경제 개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라드 도시 전경  출처 : wikipedia


아라드의 자원봉사자들은 정규 교육과 비정규 교육 모두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교육 분야 출신 봉사자들은 학교나 지역사회 센터에서 직접 수업을 맡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유력 신문 《예루살렘 포스트(Jerusalem Post)》에 소개된 참가자들의 이야기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텔아비브 대학교의 학과장 출신인 타마르 브로쉬(Tamar Brosh) 교수는 은퇴 후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는 대신, 아라드의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내 안에 여전히 줄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며, 이 활동이 아이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직접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누바누의 활동은 아라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북부 국경지역인 키리얏 쉬모나(Kiryat Shmona)에도 이 프로그램을 통한 봉사자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교사, 사회복지사, 교육심리학자 등 전문 인력이 특히 많이 필요하며, 이스라엘 교육부에서 30년간 근무하고 은퇴한 봉사자를 비롯한 다양한 경력의 자원봉사자들이 이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아누바누 프로그램의 자원봉사자들 출처 : www.jpost.com


아무런 경제적 이득도 없는 이 활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년의 정의는 나이가 아니라 기능으로 내려야 한다"는 이츠하크의 말이 그 답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기 전까지는 사회적 주체로 활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육자, 의사, 비즈니스 전문가 출신의 자원봉사자들은 소외 지역 학생들의 대학 입시를 돕거나 장애인 시설 운영을 자문하며 지역사회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와 정치를 초월한 다양한 배경의 시니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활동한다는 점도 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서 은퇴는 사회적 단절이 아니라, 전문성을 더욱 깊이 환원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간으로 인식되는 문화적 토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누바누' 외에도 '슈낫 셰루트(Shnat Sherut)'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은퇴자들이 특정 지역에 일정 기간 거주하며 공동체 생활을 함으로써 고립감을 해소하고, 동시에 활동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이스라엘 프로그램들의 원동력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행동에 나서는 정신에 있습니다. 전쟁과 안보 불안이 지속되는 오늘날, 이스라엘의 은퇴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사회에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안전망의 핵심 고리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아누바누'가 변방 도시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은퇴 이후에도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노년층의 역할이 더욱 기대됩니다. 은퇴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소멸 위기에 처한 농어촌 교회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은퇴한 교사, 의료인, 행정가들이 농어촌으로 내려가 방과 후 학습 지원, 건강 상담, 교회 행정 시스템 구축 등을 돕는 '시니어 선교사'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 교회의 은퇴자들이 농어촌 교회와 결연을 맺고 정기적으로 거주하며 사역을 돕는 '교회 인큐베이팅'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취약 계층을 돕는 구호 활동에도 은퇴 전문가들의 손길이 필요하며, 복지 사각지대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직접 발휘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탈무드 키두신(Kiddushin) 32b에서 랍비 요세이 하글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노인을 뜻하는 자켄(Zaken)은 '지혜를 얻은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자동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획득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켄'이며, 그런 사람이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은퇴자들은 자신을 단지 돌봄의 대상인 '수혜자'로만 한정 짓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달란트를 끝까지 사용하는 '사역의 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처럼 은퇴 이후의 삶을 사회와 교회를 위한 제2의 삶으로 삼을 때, 한국의 노년 사회는 더욱 밝고 건강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범수 지역전문가

20여 년 동안 이스라엘에 거주하며 이스라엘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성서학과를 졸업하고 Bar ilan University에서 이스라엘 학을 전공하였다. 주이 한국 대사관과 팔레스타인 대표사무소에 근무하며 지역 전반에 걸친 현안들을 경험하였고 현재 이스라엘 성서, 역사, 지리, 문화, 언어, 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와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