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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0

시간을 건너 다시 마주한 순간 <러브레터>

돌아보는 순간, 다시 보는 영화들


2. 시간을 건너 다시 마주한 순간 <러브레터>


비와 눈이 섞여 내리던 12월의 어느 날, 산책로를 걷다 추위를 피해 근처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늘 찾는 3층 명당 자리를 차지하려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게시판에 구민들을 위해 마련한 영화 상영 소식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모두 연말과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영화들이구나 생각하는 찰나, 그중 한 편의 제목이 저를 스무 살의 기억 속으로 끌고 갔습니다.



국내 개봉 25주년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1995년 작, 영화 <러브레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영화로 여기고, 주기적으로 재개봉이 이루어지는 작품이죠. 어떤 이들은 촬영지인 오타루를 직접 찾아갈 정도로 오랜 시간 사랑받는,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히로코는 2년 전 산에서 조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약혼남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합니다. 히로코는 그의 추도식 날, 졸업 앨범에 적힌 홋카이도 오타루의 옛 주소로 죽은 이츠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으로 답장이 도착합니다. 알고 보니 수신인은 죽은 약혼자와 이름이 같고 중학교 동창이었던 여자 후지이 이츠키였습니다. 히로코는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약혼자의 학창 시절 이야기와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을 알아갑니다. 여자 이츠키 또한 히로코의 편지를 계기로, 잊고 지냈던 동명이인 남자 이츠키와의 소녀 시절 기억을 되짚게 됩니다.


1996년 신촌, 자막도 없이 마주했던 설렘.


한국에는 1999년에 정식 개봉했지만,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만난 건 1996년 겨울이었습니다. 지금은 꽤 알려진 배우가 된 영화광 친구가 신촌의 한 대학교에서 이 영화의 필름 상영회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죠.

당시엔 일본 문화 개방 전이라 복제 비디오 테이프로만 몰래 보던 시절이었기에 필름으로 볼 수 있다는 설렘에 한 달음에 함께 신촌으로 달려갔습니다.

한글 자막조차 없었지만, 그때 제 기억에 남은 잔상은 강렬했습니다. 떠난 사랑에 대한 그리움, 하얀 눈밭과 설산, 흔들리는 카메라, 소녀 이츠키의 미소, 1인 2역의 여주인공까지… 한 편의 동화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죠.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오겡키데스카”, 그 가벼웠던 울림의 재발견


“오겡키데스카? 와타시와 겡키데스(잘 지내나요? 전 잘 지내요).” 소년에서 막 청년이 된 메마른 시절의 제게 이 장면은 그저 조금 ‘소녀스러운’ 감성으로만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일종의 밈(Meme)이 되어 희화화된 탓에 그 울림이 퇴색된 면도 있지요.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중년에 접어든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그리고 그렇게 다시 마주한 <러브레터>는 영화의 만듦새와 이야기의 깊이, 섬세한 이미지들 모두가 아련했습니다. 그저 첫사랑 멜로 영화라고 여기던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요.


첫사랑의 추억을 넘어,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에 대하여


시간이 흘러 다시 본 <러브레터>는 바로 이 너무나 유명한 설산의 외침 장면에서 저만의 새로운 감상과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야기는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라는 두 축으로 진행되지만, 주변 인물들의 모습 또한 이 질문을 완성합니다. 죽은 약혼자를 보내주지 못하는 히로코와 그녀를 사랑하는 아키바. 아키바는 이츠키와 함께 산행했던 친구로, 사고 이후 단 한 번도 산을 타지 않았습니다. 사고에 동행했던 다른 친구는 조난 사고를 예방하는 일을 하고 있죠.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다가 히로코와 대화 중 눈물을 흘리는 이츠키의 엄마.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히로코의 편지는 여자 이츠키가 외면하듯 봉인해 버린 아버지의 죽음을 소년 이츠키의 기억과 함께 꺼내 올립니다. 독감으로 쓰러진 손녀 이츠키를 업고 뛰는 할아버지는 같은 상황에서 아들을 잃었던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이츠키의 엄마는 시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는 마음속 응어리를 비로소 풀어냅니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했습니다.



영화 스틸 컷 출처 : 네이버 영화


특히 왜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가 1인 2역이어야 했을까요?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잘 지내나요? 전 잘 지내요”라는 히로코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대답처럼 되돌아오고, 병실에서 깨어난 여자 이츠키 또한 같은 말을 읊조립니다. 히로코의 이 인사는 이제야 죽은 약혼자를 온전히 보내주려는 다짐이자, 아빠의 죽음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이츠키가 그 죽음을 온전히 품어낼 수 있다는 희망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이 둘은 서로의 마음속 또 다른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책과 함께 도서 카드 러브레터가 전달되는 순간, 저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싶어졌습니다. 여러분도 그 시간을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안규 감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영화 〈미옥〉(각본·감독), 〈그대 이름은 장미〉(각색), 단편 〈사랑의 집〉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 감각을 보여왔으며,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포커스아시아 최우수작품상(2017),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특별언급(2018)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와 연극 현장을 두루 거쳤으며 장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