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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7

피에몬테에서 카프리까지–낭만시와 함께하는 두 남자의 인생 여정 <트립 투 이탈리아>



잊고 지낸지 오래다. 그 어떤 권태로움도 끌어올려 주던 여행의 힘. 조금씩 기지개를 펴는 여행 욕구에 불을 당길 여행영화 한편을 소개한다. 이야기는 누구도 반하지 않을 수 없을 이탈리아의 반짝이는 해안을 따라 녹진한 입담을 타고 내려간다.


<트립 투 이탈리아>는 영국을 대표하는 콤비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함께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기이다. 북부 피에몬테를 시작으로 서부 해안코스를 따라 남부 카프리까지 내려가는 이들의 여행에는 풍성한 음식의 향연과 더불어 영국의 낭만시인 바이런과 셸리의 흔적이 함께 한다. 두 시인의 지난 궤적을 지금 시대에 되밟아보는 두 남자는 삶과 죽음, 추억과 나이 들어감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경험한다.



영화<트립 투 이탈리아>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트립 투’ 시리즈와 변함없는 입담 콤비의 만남

일명 ‘트립 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불리는 <트립 투 이탈리아>는 잉글랜드로 시작해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로 이어지는 소소한 시리즈물이다. 우리에겐 <박물관이 살아있다>로 익숙한 코미디 배우이자 <필로미나의 기적>으로 영국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스티브 쿠건과, 자신의 이름을 건 <롭 브라이든 쇼>를 진행하며 대영제국훈장을 수상한 롭 브라이든이 ‘트립 투’ 시리즈의 변치 않는 주인공 들이다.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 역시 전작 <더 트립>을 통해 이 두 배우와의 호흡을 확인한 후 ‘트립 투’ 시리즈를 기획했다. 윈터바텀은 이미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뛰어난 연출력을 인정받은 감독이다. 스티브 쿠건이 뉴스 리포터로 열연했던 블랙코미디 <24시간 파티피플>, 파키스탄에서 런던으로의 밀입국을 다룬 로드 무비 <인 디스 월드>,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보낸 이들의 이야기를 깊은 사회적 통찰의 시선으로 주목한 <관타나모로 가는 길>등 그의 작품세계는 멜로, 코미디, 뮤지컬, 서부극까지 아우르고 있으며 극영화뿐 아니라 TV드라마,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들이 의기투합 한 ‘트립 투’ 시리즈는 최근 <트립 투 그리스>로 완성되었다.



영화는 두 입담 콤비의 이야기 속에 방대한 정보와 유머를 담고 있다. 출처: 네이버영화


바이런과 셸리, 쏟아지는 정보들

영화는 65년생 동갑내기 절친이지만 가족도, 사회적 위치도 다른 두 중년남성이 바이런과 셸리가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가며 벌어지는 일련의 여정을 담는다. 저명한 작가들이 등장하는 만큼, 영화는 내밀한 문학적 기본정보가 필요한 부분도 더러 있다. 실제 바이런과 셸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낭만파 시인으로 꼽히지만 영국이 아닌 이탈리아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예술가들이었다. 바이런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시집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수많은 스캔들을 끌고 다니며 결국 영국사회에서 외면당한다. 셸리 역시 무신론에 관한 글을 썼다가 옥스포드에서 퇴학 당한 후 이탈리아로 넘어왔고 젊은 나이에 결혼한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와 사랑에 빠지지만 요트 사고로 29살의 나이에 사망한다. 윈터바텀은 자발적으로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를 선택했던 바이런과 셸리의 모습에 현재 스티브, 롭의 모습을 겹치려는 듯 하다. 극 중 ‘바이런과 브라이든은 철자 하나 차이’라며 농담을 던지는 모습이나 시인들의 집과 묘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주인공들의 행위는 이들을 오버랩 하려는 의도로 보기 충분하다. 낭만주의 시인들이 머물렀던 곳과 그 장소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흔적을 엿보는 사이, 스티브와 롭은 현재 본인의 모습과 더불어 머지않아 다가올 미래를 대면하게 된다. 시인의 흔적에서 자신의 삶을 찾듯, 마찬가지로 극 중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 역시 그들의 추억과 현재의 마음상태를 이끌어낸다. 엘라니스 모리셋의 노래를 들으며 1995년으로 돌아가 그들의 30대를 추억하거나, 부부 사이의 파탄을 그렸던 고다르 감독의 영화 <경멸>을 언급하며 아내와의 관계속에 흔들리는 롭의 모습을 웃음으로 투영하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바이런의 시를 가사로 쓰고 있는 레너드 코헨의 처럼 나이 들어감에 대한 이들의 성찰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거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대부>, 페데리코 펠리니의 <로마>처럼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언급하며 그들의 여정에 흥을 돋운다. 쏟아지는 정보들로 한껏 풍요로워지는 영화이지만 그 정보를 다 따라가지 못하는 관객들에겐 다소 어려운 영화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트립 투’ 시리즈의 변하지 않는 고집이자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삶과 자연이 어우러진 이탈리아의 평화로운 풍경. 출처: 네이버영화



여행지마다 진귀한 음식이 등장하는 식사 장면은 이 영화의 큰 재미 중 하나다. 출처: 네이버영화


죽음의 쓸쓸함과 이를 승화한 유머

바이런과 셸리, 또 언급되는 수많은 정보들을 통해 스티브와 롭은 자신의 과거, 현재와 더불어 장차 다가올 죽음을 바라본다. 두 사람이 가는 곳은 대부분 바이런과 셸리가 죽기 전에 살았던 곳과 죽음을 맞이한 곳, 또 폼페이 유적지나 로마 지하묘지처럼 죽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셸리의 화장을 담은 그림과 200년 전의 미이라를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머지않아 필연적으로 죽음을 대면 할 자신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영국의 인텔리그룹이자 유명한 공인으로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 허무함만이 감도는 누군가의 무덤 앞에서 그들은 농담처럼 ‘우리 모두는 늙어가고 곧 죽을 거다’, ‘그 동안의 재담, 노래, 유쾌함은 다 어디 갔느냐’를 부르짖는다. 그 사이 카메라는 그들의 허무한의 표정에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죽음이란 화두가 건네는 진지함의 고뇌를 놓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나이들어감’이라는, 조금은 서글픈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두 코미디 배우가 던지는 유머의 향연으로 이를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웃음이야 말로 연약한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듯 하다. 그 활용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음악이다. 영화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중 하나인 선셋을 자주 등장시키는데 이 곡은 독일 낭만파 시인 아이헨도르프의 시 일부를 노랫말로 사용하고 있다. 가사는 이러하다.


'슬픔과 기쁨을 헤쳐 나가자. 손에 손잡고. 방랑을 접고 휴식을 취하자. 여기 조용한 땅에서’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충족시키는 영화 속 장면들. 출처: 네이버영화


이 곡은 셸리가 죽음을 맞이한 바다를 건너는 장면, 그리고 엔딩에 스티브가 아들과 다이빙하는 장면, 롭이 노팅 힐의 엔딩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조용히 흐른다. 선셋이란 의미는 표면적으로 보면 황혼을 의미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아직 그 빛이 다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을 썼던 셀린느의 말처럼 우리의 삶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임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스티브처럼 권태로워지는 시기, 롭 처럼 새로운 국면을 맞는 시기에도 잠시 멈춰서 남은 노을의 빛을 함께 바라보는 여유 또한 우리 삶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방법임을 영화는 고즈넉한 이탈리아의 정취를 벗 삼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두 남자의 여정은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며,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은 면을 보여준다.  출처: 네이버영화


여정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전형적인 로드무비의 공식을 우회하는 <트립 투 이탈리아>는 중반부, 뜬금없이 시칠리아로 가려던 여정을 변경해버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의 모습이 그러하다. 예고치 않은 변화, 사건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결코 추측할 수 없는 모든 것들. 이런 삶의 속성을 통달하기라도 하듯, 극 중 롭은 태연하게 말한다.


"터널 끝에는 빛이 보이는 법이야. 하지만 밝아졌다 싶을 때 다시 컴컴해지기 마련이지"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