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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2

이 그림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⑨

예술이 도시를 살리다 – 리차드 세라와 빌바오의 기적


리차드 세라 (Richard Serra, 1938–2024)

미국의 현대 조각가 리차드 세라는 본래 회화를 전공했지만,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고는 회화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없다고 느끼며 조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Richard Serra (1938-2024)  출처 : wikipedia

그의 아버지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의 조선소에서 배관공으로 일했는데, 세라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회사에서 만든 거대한 강철 배가 바다로 미끄러지듯 진입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본인 역시 제철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초대형 강철이라는 재료에 누구보다 강렬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훗날 작업의 재료와 스케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리차드 세라는 실제로도 “내 작업의 시작은 강철이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강철이라는 재료에 대한 물리적 기억은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공통된 정서와 감각의 토대가 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그는 고무, 네온, 납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다가, 점차 대형 강철판을 이용한 설치미술로 전환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Tilted Arc, Richard Serra, 1981   출처 : wikipedia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1981년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 청사 앞 광장에 설치된 〈틸티드 아크〉(Tilted Arc)이다. 이 작품은 길이 약 37미터, 높이 3.6미터의 거대한 녹슨 강철판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설치되어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공공미술의 역할과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쟁과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결국 세라는 8년 만에 소송에서 패소해 작품은 철거되었다. 이 사건은 공공 예술이 가지는 존재의 의미와 한계, 시민 사회와의 긴장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작품의 존폐를 넘어서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와 시민의 공공권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 전례로 이후 미국 내 공공미술 설치와 관리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성격이 강하고 고집이 셌던 세라는 동료 예술가들과도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그는 소장용 예술보다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관계를 맺는 예술을 지향했다. 그의 거대한 강철판 조각들은 이제 현대미술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설치된 〈시간의 문제〉(The Matter of Time), 카타르 사막에 세운 〈동-서/서-동〉(East-West/West-East)과 같은 작품은 관람객이 그 사이를 직접 걸으며 공간감, 경외감, 때로는 불편한 긴장감까지 느끼게 만든다. 세라는 그의 작품들이 “그 장소 자체를 새롭게 정의한다”(site-specific)고 여겼다. 


이미지 출처 :  카타르 뮤지엄    qm.org.qa

site-specific 작업은 기존 전시공간의 규격과 벽면에 의존하지 않고, 공간의 고유한 맥락과 물리적 조건을 고려하여 제작되는 작업이다. 세라는 이러한 개념을 현대 조각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작품이 갖고 있는 이야기

The Matter of Time 〈시간의 문제〉는 리차드 세라가 2005년에 완성한 대규모 장소 설치 작품으로, 총 8개의 강철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게는 총 900톤이 넘고, 높이는 4미터를 넘는 작품도 있다. 초대형 강철이라는 재료의 무게감과 밀도를 강조하면서도, 곡선 형태로 휘어지게 만들어 강철이 지닌 물리적 성질을 새로운 감각으로 경험하게 한다.


Richard Serra, The Matter of Time 출처 : www.guggenheim.org

관람객은 이 거대한 조각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조각을 마주하게 된다. 미로 같은 공간을 걸을수록,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 매번 다르게 느껴진다. 관람자가 조각 사이를 이동하면서 겪는 심리적 감정은 단순한 미적 체험을 넘어선다. 작품은 '공간 속에서의 움직임'과 '내면의 인식 변화'를 유도하며, 물질과 감각, 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예술 언어로 엮는다.

이 작품은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약 9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처음 조각 중 하나인 〈스네이크〉(Snake)는 1997년 구겐하임 빌바오 개관에 맞춰 설치되었고, 나머지 7개 조각은 2005년 영구 설치로 추가 제작되었다. 가장 가벼운 조각이 44톤, 가장 무거운 것은 무려 276톤에 달하며, 이들은 크레인과 특수 장비를 동원해 빌바오 미술관 내 아르셀로르(Arcelor) 갤러리에 설치되었다.

이 작품은 미술관 내부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공간에 맞춤 설계된 ‘고정형’ 작품으로, 이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세라는 이 작품에서 ‘웨더링 스틸’(Weathering Steel)을 사용했다. 이 강철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표면 색이 회색에서 오렌지색을 거쳐 짙은 고동색으로 변하는 특성이 있어, 작품을 통해 시간의 흐름 자체가 시각화된다. '시간의 문제'는 단순한 조각 설치가 아니라, 하나의 물리적 서사 구조로 볼 수 있다. 작품 내부를 걷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시간을 걷는' 감각적 체험으로 확장되며, 조각의 안과 밖, 선과 곡면이 반복적으로 관람객의 인지와 정서를 자극한다.

작품이 있는 곳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Guggenheim Bilbao)

스페인 북부의 도시 빌바오는 한국의 포항처럼 제철과 조선업으로 유명했던 산업도시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철강산업의 쇠퇴로 도시 경제는 침체되었고, 실업률은 24%에 달했다. 이에 바스크 지방정부는 도시 재생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문화 산업에 눈을 돌렸다. 수많은 논의와 회의 끝에 1991년 지방정부는 당시 1억 달러를 투자해 구겐하임 빌바오 분관 유치에 성공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들어오기 전과 후의 빌바오 모습


이 결정은 당시로선 매우 혁신적이고도 대담한 시도였다. 지역 주민들과 의회의 반대도 있었지만, “예술이 도시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결국 도시 재생의 성공 모델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유려하고 곡선적인 디자인이 채택되었고, 건축은 1993년에 시작해 1997년 10월 공식 개관했다.


빌바오 구겐하임의 여러 모습들    이미지 출처 :  www.guggenheim-bilbao

이 미술관은 매년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그 절반 이상은 외국인 방문자다. 바스크 지방정부는 이를 통해 매년 100억 원 가까운 세수를 확보하고 있다고 하니, ‘빌바오 효과’는 도시재생의 교과서처럼 회자된다. ‘빌바오 효과’는 이후 많은 도시들이 예술·건축을 통해 경제 활성화와 이미지 개선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구겐하임 빌바오는 그 상징적 모델로 전 세계 도시재생 담론에서 인용되고 있다.

리처드 세라의 미니멀리즘



아티스트 스토리 
리처드 세라:  평등

강두필 교수

한동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박사과정 수료했다. Paris 소재 CLAP35 Production 대표 감독(CF, Documentary)이며, 저서로는 좋은 광고의 10가지 원칙(시공아트), 아빠와 떠나는 유럽 미술여행(아트북스), 모두가 그녀를 따라 한다(다산북스),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다산북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인의 CF 감독(살림출판사) 등이 있다. 전 세계 미술관 꼼꼼하게 찾아다니기와 매일의 일상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기고 편집해 두는 것이 취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