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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30

[에덴클래식] #3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클래식



따스한 봄기운과 함께 꽃망울이 불거지고 가녀린 잎새들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마음은 예년과 같지 않다. 자연스레 삶의 의미나 죽음에 대한 상념을 마주하게 되는 이때, 그나마 브람스가 골라준 성경 구절들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위로와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된다.


브람스, 독일진혼곡 Brahms, Ein Deutsches Requiem, Op.45

30대 중반에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한 개신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후 정식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신앙생활에 그리 충실한 편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교회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성경 구절들은 자주 접했다.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들어오질 않을 때면 성경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고, 종교음악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읽게 되는 성경 구절들은 경건한 음률과 어우러져 언제나 위로와 안식을 주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생각도 자주 하게 되고, 가까운 사람들의 부음을 접할 때는 편히 쉬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도 한다. 내가 자주 듣는 종교 음악은 레퀴엠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이지만 살아남아 있는 자들의 슬픔을 치유하는 음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브람스가 슈만을 찾아갔을 때 그는 20살의 무명에 가까운 청년이었다.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는 한눈에 브람스의 재능을 알아냈고, 독일 음악계에 브람스를 알리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이후 슈만은 1856년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가 슈만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함께 한 시간은 불과 6개월 정도였지만 음악적 스승 이상의 존재였던 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컸을 것이다. 브람스는 스승의 죽음을 음악으로 위로하고 싶어 ‘레퀴엠’ 작곡을 진지하게 구상해 보았으나, 이제 막 피아노 독주곡 몇 작품만을 세상에 발표한 청년 작곡가에게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865년에 브람스는 모친을 잃었다. 44세의 늦은 나이에 그를 낳은 모친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브람스는 이를 계기로 스승의 사망 시점에 구상했던 레퀴엠의 작곡을 서둘렀다. 이듬해인 1866년에는 가곡 몇 곡을 제외하고는 이 레퀴엠에 전념, 전체 7곡 중 6곡을 그해에 작곡했고, 1867년에 제5곡을 추가로 작곡하여 전 7곡으로 구성된 레퀴엠을 완성했다. 슈만의 죽음을 계기로 작곡을 구상한 지 10년 만에 마침내 완전한 형태의 걸작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레퀴엠(Requiem, 진혼곡)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으로 본래 카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문典禮文에 곡을 붙인 미사missa곡을 의미한다. 모차르트, 베르디, 포레 등 음악가들이 남긴 레퀴엠은 모두 이 전통에 따라 라틴어 전례문에 곡을 붙였다. 그렇지만 브람스가 작곡한 레퀴엠은 이들 레퀴엠과 성격을 달리한다. 카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문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에서 브람스 자신이 선택한 텍스트에 곡을 붙였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불리기 위한 전례음악典禮音樂이 아니라 음악회용 레퀴엠으로 봐야 한다. 죽은 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이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슬픔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음악이기도 하다. 원 제명은 ‘성서 본문에 따른 독창과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독일어 레퀴엠’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독일진혼곡Ein Deutsches Requiem'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번 클래식은 곡에 삽입된 가사(성경 구절)를 읽으며 듣기를 추천한다.


-제1곡: 합창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편 5절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편 6절


세상의 슬픔, 그러나 슬퍼하는 자는 마침내 위로받을 것임을 합창으로 느리고 조용하게, 그리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노래한다. 화려한 음색의 바이올린은 배제된 채 중저음 현악기로 어두운 분위기의 반주가 시작되고, 이어 나타나는 합창은 경건하고 아름답지만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복’과 ‘기쁨’을 노래하는 부분에서 잠시 기분이 고조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슬픔이다.


-제2곡: 합창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야고보서 5장 7절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이사야서 35장 10절


팀파니의 규칙적인 두드림을 배경으로 관현악이 느리지만 엄숙한 행진곡풍의 선율을 제시한 후, 합창이 덧없는 인생을 풀과 꽃에 비유한 성경 구절을 비통하게 노래한다. 야고보서 ‘형제들아, 주가 강림하시기까지 참으라...’를 노래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비통함이 사라지고 잠시나마 아름다운 선율이 평온하게 전개되지만 다시 쓸쓸한 곡조의 베드로전서 말씀을 다시 한번 노래한다. 그렇지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에 이르러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장엄하면서도 환희에 찬 가락이 울려 퍼진다. 이 기쁨의 곡조는 이사야 말씀으로 옮겨 경건하면서 확신에 찬 희망의 노래가 되어 끝을 맺는다.



독일 본에 묻힌 슈만의 묘지석. 슈만은 브람스의 재능을 발견한 스승이자 그 이상의 존재였다.


-제3곡: 바리톤 독창과 합창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들지는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편 4-7절  


나약한 인간의 굳은 신앙심을 호소한 시편의 구절들을 음악으로 구현한 것으로 브람스의 ‘독일진혹곡’ 중에서 구성적으로나 내용면에 있어서 가장 충실하고 완성도가 높은 곡이다. 바리톤 독창이 인간의 연약함과 허무한 인생을 고통스럽게 탄식하고 합창도 이에 따르지만, 시편 마지막 구절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에 이르러서는 경건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로 변하여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곧이어 푸가(주제를 여러 성부가 규율성을 가지고 모방 반복하는 기악 형식으로 바로크시대의 가장 중요한 음악형식 중 하나) 풍의 선율로 불려지는 ‘올바른 사람의 영혼이 주님의 손에 있으니 어떤 고통도 그들에게 닿지 않으리다.’(외경 ‘솔로몬의 지혜’ 제 3장 1절) 부분은 강한 신앙심을 천상의 음률로 호소하는 듯하다. 


-제4곡: 합창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편 84편 1-2절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84편 4절


환희에 찬 선율로 천국의 평온함을 노래한다. 3곡 끝부분과 같이 경건하게 주를 찬양하는 곡이지만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기쁨에 찬 선율이 계속되어 장엄함이나 엄숙함 대신 안락함이 느껴진다.


-제5곡: 소프라노 독창, 합창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한복음 16장 22절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니...’ 이사야서 66장 13절

‘내가 잠시 수고한 걸 너희가 보았으나 나는 큰 휴식을 얻었노라.’ 구약외경 ‘펜실라의 지혜’ 중


전 7곡 중 가장 마지막에 작곡한 곡으로 소프라노 독창이 일관되게 위로의 선율을 노래하고, 합창이 응답하면서 전반적으로 밝고 온화한 분위기를 이끈다. 요한복음, 이사야서, 구약외경 등에서 차용한 가사 내용과 같이 위안과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오스트리아 빈의 브람스 동상


-제6곡: 바리톤 독창, 합창 ‘우리가 영구히 머물 도성은 없고’


‘우리가 영구히 머물 도성은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브리서 13장 14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 54-55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


가톨릭 전례에 따른 레퀴엠의 ‘진노의 날’에 해당하는 곡이다. 가장 장대한 구성에 극적인 효과가 더해져 진혼곡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합창으로 시작하는 첫 부분은 인간의 애통하면서도 불안한 감정을 호소하고, 이어 나타나는 바리톤 독창은 이런 불안함을 진정시켜주듯 차분한 곡조로 부활의 예언을 노래한다. ‘나팔소리가 나매...’로 시작되는 부활의 메시지 부분에 이르러 트롬본과 튜바, 그리고 팀파니까지 동원되는 관현악이 합창이 어우러져 ‘심판의 날’의 공포와 구원에 대한 기대감이 얽힌 강렬한 화음을 비바체(vivace, 아주 빠르게)의 속도로 쏟아낸다. 후반부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기쁨으로 힘차고 경건한 합창이 주를 찬미한다. 


-제7곡: 합창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4장 13절


제6곡에서의 흥분은 사라졌다.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고 영원한 안식처의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느리고 장중하게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의 구절이 반복되면서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끝을 맺는다.


슈만의 죽음을 계기로 구상하기 시작한 후 10여 년 만에 전 7곡을 완성했지만 신중한 성격의 브람스는 완성 후 2년 가까이 지난 1869년(36세)에 ‘독일진혼곡’을 초연했다. 비평가들은 이 위대한 작품에 최고의 찬사들을 쏟아냈고, 브람스는 당대 최고 작곡가 위치에 올랐으며, 자신감을 얻은 그는 훗날 베토벤의 교향곡에 필적할만한 걸작 교향곡들을 작곡했다.




♪ 음악 들어보기


브람스, 독일진혼곡 Brahms, Ein Deutsches Requiem, Op.45


클라우디아 아바도Claudio Abbado 지휘




서울 모테트 합창단 (Seoul Motet Choir)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격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