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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1-02-19

물과 불, 자연의 색이 전하는 이야기



변화무쌍한 계절에 앞서 숨을 고르는 시기. 자연이 주는 안온함을 느껴볼 만한 전시를 소개한다. 남프랑스 생폴드방스에 거주하며 작업하는 김민정 작가가 4년 만에 갤러리 현대에서 여는 개인전(2.19~3.28)이다. 조각낸 한지 가장자리를 태워 콜라주 방식으로 작업하는 그녀의 노동집약적인 결과물은 놀라운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미술관 전시나 비엔날레에서 주로 만날 수 있던 김민정 작가의 작품을 한데 모아서 볼 수 있다는 건 꽤 행운이다. 남프랑스가 주 거주지라 국내에서 개인전을 자주 하지 않는 작가인 데다, 작업 특성상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많은 신작을 한꺼번에 볼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김민정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평소에 한지를 좁고 길게, 동그랗게, 그리고 세모, 네모 모양으로 오려 많은 조각을 만들어 가장자리 부분을 촛불이나 향불로 조심스럽게 태운다. 그 후 작가가 원하는 그림에 맞추어 그것을 콜라주 형식으로 붙여 큰 작품을 완성한다. 그 작품을 멀리서 보면 마치 수묵화처럼, 때로는 튀어나온 조각처럼 보이는데, 불에 그을린 한지 조각이 만들어내는 입체감이 그야말로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김민정 작가의 스튜디오 전경


작품의 재료가 되는 한지를 불로 태우는 모습


이번 전시엔 세심한 수공과 집중의 과정을 통해 제작된 30여 점의 작품이 소개된다. 작가는 최근 두 달간 개인전을 위해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작업을 계속했는데, 이때 완성한 신작도 함께 공개돼 더욱 의미가 크다. 갤러리 지하와 1층, 2층에 걸쳐 구작과 신작 대형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극도의 정교함과 극한의 노동이 전하는 전율과 마주하게 된다.




갤러리현대 전시 전경


수묵과 한지 등을 사용했기 때문일까? 김민정 작가의 작품에선 동양화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맞다. 그녀는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출신이다. 하지만 미술을 공부할 때부터 워낙 르네상스 미술을 동경했던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고, 그 후 프랑스로 옮겨 지금껏 남프랑스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 생폴드방스에 머물고 있다. 그녀의 대표 작품들은 대부분 무채색이지만 초기 작은 매우 컬러풀하다. 색색의 한지를 도넛 형태로 잘라 콜라주한 작업 시리즈인데 형형색색의 한지를 도넛 형태로 오린 뒤 가장자리를 태우고 중간에서부터 붙여나가는 방식이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색’이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작품은 최대한 화려하게 작업합니다.” 기본 재료는 미리 만들어놓지만 화면에서 어떤 모습으로 최종 구현될지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이번 전시를 위해 색 한지 작업을 다시 했는데, 오랜만에 매우 재미있었다고 작가는 전한다.


Pieno di Vuoto,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40×105cm, 2020


초기작을 제외하면 그 이후 작가의 작품 톤은 모노톤, 또는 파스텔톤이 대부분이다. 투명한 한지를 사용하거나, 하얀 한지에 채색을 한 후 그것을 조각 내 사용하기 때문인데, 작품에 사용하는 컬러의 변화는 사실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노톤으로 넘어가게 된 것. 작가는 모노톤의 특성상 고요함이 주는 집중력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이 구체적 형상을 띠지 않는 추상적 화면이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단색화의 맥을 물려받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지의 가장자리를 불로 태운 흔적과 같이 물감으로는 낼 수 없는 묘한 색감을 발산하는 김민정 작가의 작품은 분명 작가만의 깊이를 보여준다.


Nautilus,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207×146.5cm, 2020


The Room,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205 x 143cm, 2019


작가의 또 다른 특징은 한지가 가진 물성을 최대한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한지가 가진 시간성과 정신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지가 가진 투명성에서 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Sculpture’나 ‘Couple’과 같이 투명한 한지들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마치 조각과 같은 입체감을 표현하기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잘라놓은 한지의 가장자리를 스틱 인센스로 태운다. 대접에 아주 묽은 물풀을 만든 후에 한지 조각을 물 위에 둥둥 띄우고 핀셋으로 집어 조심조심 붙인다. 하나하나 집중하지 않으면 한지가 너무 얇아 풀이 이쪽저쪽에 다 묻어나 엉망이 되고 만다. 유화물감이나 캔버스보다 보존력이 뛰어나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형체를 보전하는 한지라는 매체는 김민정 작가의 동양적 정체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중요 수단이다.


Sculpture,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202×142cm, 2019





Couple,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40×40cm(each), 2019


“김민정 작가가 매체를 매만지며 공들인 시간과 노력은

화면 앞에선 관객도 그대로 읽어낼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기에 김민정의 한지 콜라주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수고로운 제작 과정 끝에 작가가 느낀 기쁨과 환희를 똑같이 느낄 수 있다.”

-평론가 권영진 <김민정, 물과 불의 한지를 겹쳐놓다> 중에서



Mountain, Ink on Mulberry Hanji Paper, 136×173.5cm, 2021



Timeless, Watercolor and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80×136cm, 2020



Timeless,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43.5 X 194cm, 2019


전시의 제목과도 연결된 작품 ‘Timeless’와 이번 전시의 유일한 수묵화 연작 ‘Mountain’은 개인전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 ‘Timeless’ 시리즈는 김민정 작가가 직접 그린 수묵화 ‘Mountain’을 길게 잘라 그 가장자리를 태운 후 차례로 겹쳐 붙인 작품. 사실 ‘Mountain’은 ‘산’을 뜻하지만, 작가는 본래 바다를 그린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뜻 산처럼 보여 작품 이름을 ‘Mountain’이라고 지은 것이라고. ‘Timeless’를 보며 관객들이 혹시 바다 물결의 흔적을 느꼈다면, 그것은 ‘Mountain’에서 잘라낸 바다의 물결과 그 흐름의 영원성을 화면에 담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업 과정과 결과물에 자연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불과 물, 두 요소가 오롯이 담겨있는 김민정 작가의 작품을 통해 모처럼 만의 안식과 평화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사진 제공 갤러리현대

김이신 <아트 나우>편집장

<아트 나우>편집장. 매일경제신문사 주간지 <시티라이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마담휘가로>를 거쳐 현재 <노블레스> 피쳐 디렉터와 <아트나우> 편집장을 맡고 있다. 국내 아트 컬렉터들에게 현대미술작가 및 글로벌 아트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8-2019 아티커버리 전문가 패널, 2018-2019 몽블랑 후원자상 노미네이터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