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문의031-645-9191

에덴 미디어

컬처
2021-0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길을 걷는다는 것은



흔히들  삶을 ‘길’에, 사는 것을 ‘걸음’에 비유하곤 한다. 끊임없는 반복의 과정이라는 것 외에도 살아가는 것은 실제로 길고 긴 길을 걸어가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이번 영화 리뷰는 전례없이 어려운 이 시기만큼이나 녹록지 않은 여정을 그린 작품을 담았다.



2월이 찾아왔다. 한겨울의 중반부를 지나고 있는 요즘, 문득 코에 감기는 따뜻한 정취를 느낄 때면 봄이 성큼 가까워 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물론 올해도 우리가 맞이할 봄은 예년과 같지 않겠지만 찬란한 봄을 다시 체감할 날을 기다리며 함께 보기 좋은 영화 <와일드>를 소개한다. 아름다운 대자연이 주는 감동과 더불어 자연 속 인간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셰릴 스트레이드의 원작소설 <와일드>와 PCT.

영화 <와일드>는 셰릴 스트레이드의 동명 자서전 <와일드>를 원작으로 한 장 마크 발레 감독의 2013년 작품이다.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2012년 출간될 당시 오프라 윈프리의 '오프라 북클럽 2.0'에 올해의 첫 번째 책으로 선정되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엄마의 죽음 후 피폐했던 삶을 청산하고자 PCT에 참여하게 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화는 그 여정에서 만나는 대자연의 정취를 고스란히 품는다. 주인공 셰릴(리즈 위더스푼)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끔찍한 가난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어린 시절 경험한 부모의 이혼은 유년기의 큰 상처로 여전히 남아있다. 홀로 남은 엄마와 함께 한 걸음 새로운 삶에 도전하지만, 유일하게 의지하던 엄마마저 암으로 잃게 되자 삶에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후, 셰릴은 끔찍한 방황의 길로 들어선다. 술과 마약 등 끊을 수 없는 어둠으로 침잠하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회복의 기회를 얻고자 일명 ‘악마의 코스’로 불리는 등반길 PCT를 걷기 시작한다.



<와일드>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PCT는 'The Pacific Crest Trail'의 약자로 '태평양 산자락 길' 정도의 의미로 해석된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 너머까지 총 4,285km의 도보 길이며 거리로 비교해보자면 서울에서 부산을 5번 왕복하는 정도이다. 평균 152일 소요, 1년에 120명 정도만 성공하는 일명 악마의 코스로 유명한 등반길이다. 멀고 험난한 길이지만 PCT코스에 참여한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의 집합체’라고 이야기한다. 총 9개의 산과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파른 바위산에서부터 눈 덮인 고산지대, 그리고 초원, 사막, 화산지대,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고된 곳이기도 하다. 잦은 폭설과 화재 같은 자연재해가 예고 없이 일어나는 것은 부지기수이고 사람과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어 끊임없는 외로움과 고독이 존재하는 암흑의 코스이기 때문이다.


셰릴의 여정에 관객을 초대하는 감각적인 영상연출

영화 <와일드>는 다양한 감각적 은유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이다. 주목해 볼 지점은 이런 감각적인 영상언어가 셰릴이 겪는 야생의 리얼함, 고통과 회복의 여정에 관객을 간접적으로 초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거대한 자연과 그 안에 존재하는 작은 인간의 모습에 주목한다. 깨끗한 자연광과 와이드샷을 통해 담은 대자연의 모습, 그리고 자연의 품 안에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하염없이 걷는 작은 여성의 모습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평안을 준다. 때때로 카메라는 와이드가 아닌 강렬한 인물 클로즈업을 통해 셰릴의 미세한 표정에 주목하고, 그녀가 내뱉는 속삭임에도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며 셰릴의 생각을 관객과 공유한다.



영화는 클로즈업을 통해 셰릴의 생생한 표정과 감정을 관객과 공유한다. 출처:네이버영화


또 하나 눈여겨 볼 지점은 영화가 셰릴의 방황하던 과거의 시간과 PCT를 걷는 현재의 시간을 자주 교차하며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가 자주 교차하면 미묘한 간극이 생겨 관객의 집중을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이 영화는 감각적인 ‘매개물’을 활용하여 최대한 이 두 시간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유려한 연출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셰릴이 호루라기를 입에 물자 방탕했던 과거의 비슷한 기억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거나, 시종일관 펼쳐지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어느 순간 액자 유리에 비친 과거 엄마의 엑스레이 사진으로 변한다. 카 오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은 엄마가 예전에 부르던 노래의 기억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며 자칫 낯설고 급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셰릴의 회상에 자연스럽게 이입하게 한다.



대비되는 현재와 회상의 장면이 자연스레 삶을 생각하게 한다. 출처:네이버영화


이는 다양한 생각의 지점을 던져준다. 과거라는 것 혹은 과거의 상처라는 것은 현재와 단절되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일까? 자연 속에 가장 충만한 시간을 겪을 때도 불현듯 지우고 싶은 과거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셰릴이 걷고 있는 PCT처럼, 삶이라는 끝없는 여정은 우리를 때때로 과거의 기억 정 중앙에 놓아두기도 한다. 그러나 지우고 싶은 과거의 기억을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어도 새롭게 바꾸고자 인고와 노력 속에 있다 보면 그 상흔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셰릴의 모습은 끊임없이 발목을 잡는 과거를 지금의 행복으로 감싼 채, 묵묵히 걸어가야만 하는 고독한 인간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장면 곳곳에는 고독한 현실을 달랠 감동이 자리한다. 출처:네이버영화


아름다운 자연과 음악이 있기에 오늘도 한 걸음

원작과 달리, 영화 <와일드>는 사운드를 통한 벅찬 감동의 지점을 선사한다. 극 중 트래킹 친구가 셰릴에게 ‘흥얼거린 노래가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뇌리에 머문다’는 말을 던지는데, 이는 셰릴을 포함해 관객들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영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두 곡을 주요 OST로 사용한다. 한 곡은 <홍하의 골짜기>라는 곡으로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한두 번 불러보았을 유명한 미국민요이다. 가사는 이러하다. '정든 이 계곡을 떠나가는 그대의 정다운 그 얼굴 다시 한 번만 얘기 하고픈 목장의 푸른 잔디밭 위 언덕을 넘어서 가던 그 날 수선화가 피어 있었네. 다시 오려마 아 목동이 사는 계곡' 이는 대자연 속에서 느낀 가슴 벅찬 감동과 위로 그리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의미로서 따스함을 전해준다. 또 하나의 곡은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엘 콘도 파사>이다. 셰릴이 방탕했던 과거의 장면을 회상함과 동시에 흘러가는 강을 건너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못이 아니면 망치가 되겠다고 하는 가사처럼 고통을 던지고 새로운 치유와 희망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각오를 이야기한다.



삶은 목표에 도착하는 것이 아닌 목표를 향해 걸음을 떼는 의지와 용기로 이루어지는 것. 출처:네이버영화


인생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영화는 셰릴이 최종 목적지인 캐나다 국경선을 통과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은 채 신들의 다리에 도착한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 삶은 목표에 도착하는 것이 아닌 목표를 향해 걸음을 떼는 의지와 용기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직 남아있는 PCT코스처럼 고난은 또다시 우리를 찾아오겠지만 예전처럼 무너지지 않고 결국 이겨낼 수 있음을 셰릴의 여정을 통해 함께 느끼는 것, 이 영화가 주는 가장 큰 희망의 메시지이다.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