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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1-01-08

외피 너머 진실과 마주할 용기를, <작가 미상>



흔히 21세기를 정보화 사회라고 부른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도처에 선명한 정보들이 널려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명징한 정보들이 넘쳐날수록 우리의 시선은 흐려진다. 예술은 이처럼 ‘사실’로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진실’로 인도한다. 영화 <작가 미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새해를 맞이하며

2021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오래된 것들은 흘려보내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모습들로 분주하다. 이를테면 피트니스센터는 원래 이 마음 때쯤이면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회원들로 새벽부터 활기를 띠곤 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 하지만 올해는 사뭇 다르다. 지구촌 모두에게 가장 힘든 해로 기억될 2020년을 막 넘어온 사람들은 이제 차분한 일상 속에서 모든 것이 회복되는 2021년이 되기를 어느 때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도 이전까지 세우던 거창한 각오들과는 조금 다른 결의 다짐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가족들에게 좀 더 따스한 말하기, 환경을 생각해 마스크는 최소한으로 사용하기 등, 대폭 축소된 일상 반경에서 이룰 수 있는 소소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다짐들 말이다. 가장 무게를 둔 다짐은 ‘바르게 보려고 노력하기’이다. 자세하게 말하면 ‘용기 있게 진실을 마주하는 태도 기르기’라고 해야 할까? (의도와는 다르게 갑자기 거창한 느낌이 되어버렸다)


<작가 미상>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작가 미상>이 담는 혼돈의 시기 그리고 예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소개할 <작가 미상>은 전후 혼돈의 시대를 배경으로 예술이 보여준 도전과 그 의미를 탁월한 연출로 담아낸 수작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주인공 쿠르트(톰 쉴링 분)의 상처 입은 유년기부터 예술가로 살게 되는 청장년기의 시간을 무게 있게 담아낸다. 남다른 예술 감각이 있는 쿠르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 재능을 인정받아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여인 엘리자베스(폴라 비어 분)를 만나 행복한 미래를 꿈꾸지만, 그녀의 아버지 칼(세바스티앙 코치 분)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다. 칼은 세계대전 당시 나치 우생학을 따르던 군의였고 그의 야만으로 인해 쿠르트의 이모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다. 전쟁이 끝난 후, 그림 실력을 인정받은 쿠르트의 생활은 점점 나아지지만, 사회주의 이념에 갇힌 동독의 예술세계에서 갈등하던 그는 서독으로 향하게 되고 현대미술의 시기에 발을 들이며 그만의 작품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재능 있는 화가 쿠르트와 그의 연인 엘리자베스. 출처: 네이버영화

나치 우생학을 따르던 칼은 전후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간다.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는 무너진 이성의 회복과 이념 간의 충돌이 극에 달았던 혼란스러운 전후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2007년 <타인의 삶>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Florian Henckel von Donnersmarck 감독은 전작에 이어 <작가 미상>에서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에 주목한다. 나치에게 사랑하는 이모를 잃으며 역사의 비극을 직접 경험한 유년시절에 이어, 표현과 창작의 자유로움이 배제된 예술의 강요는 쿠르트에게 진실을 보고자 하는 용기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는 붓을 들어 캔버스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모티프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사진’이다. 그것도 두 개의 사진. 하나는 어릴 적 찍은 쿠르트와 이모의 사진이고 또 하나는 신문에 실린 장인 ‘칼’의 사진이다. 그는 조심스레 그 위에 붓질하기 시작한다.

쿠르트는 자신과 이모가 찍힌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출처: 네이버영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삶을 재조명하다
쿠르트의 실존 모델인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사진을 소재로 그 위에 페인팅을 입히는 일명 ‘포토리얼리즘’으로 주목받은 인물이다. 감독은 그의 실제 삶을 영화 속에 재구성하며, 진정 리히터가 포토리얼리즘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추적한다. 영화 속 설정처럼 실제 리히터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 서독으로 넘어와 팝아트에 영향을 받았고, 이전 동독에서 구사하던 ‘사회주의 사실주의’ 기법을 풍자한 ‘자본주의 사실주의’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주목받았던 것은 신문과 잡지에서 가져온 사진 위에 페인팅으로 슬쩍 흐리게 덧대는 작업이었다. 이는 당시 사진이 가진 위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도전적인 예술의 접근법이라고 볼 수 있다. 재현, 리얼리즘, 현재성 등 보도적 성향이 짙은 사진을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눈으로 믿는 것들의 실체를 흐리게 만들고 그 너머에 있는 가려진 진실을 바라보게 한다. 이는 고전시기에 비해 예술이 가진 가치가 폄하된 자본의 시기 속에서도, 여전히 순수하게 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길잡이로서 예술을 떠올리게 한다.

출처: 네이버영화

진실은 아름다운 거야, 절대 눈 돌리지마
우리는 가끔 예술이 가진 사회적 역할을 생각하곤 한다. 그에 대한 생각의 범위는 워낙 넓고 다양하므로 물론 정답은 없다. 어떤 이는 인간 삶에 예술이 부여하는 풍요로움에 주목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예술의 창조성이 품은 경제적 가치를 환산하기도 한다. 물론 ‘예술은 죄다 사기야!’ 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주목하게 되는 것은 분별력을 지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예술이다. 창의성이나 아름다움 같은 예술의 순수한 속성을 통해 21세기 쏟아지는 이미지의 정보 속 우리의 갇혀버린 시선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분별력이 요구되는 시기에 올바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돕는 것. 이 또한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가진 역할일 것이다. 이는 극중 쿠르트의 작품을 통해 더 깊이 사유된다. 나치의 희생양이 되었던, 누구보다 순수했던 쿠르트의 이모와 과거를 숨긴 채 살아가는 칼. 사진상으로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이 둘은 같은 캔버스 위에서 숨 쉰다. 아름다운 기억 속의 쿠르트와 이모, 그 시간을 둘러싼 남겨진 진실, 더불어 더 깊이 감추려 하는 반성 없는 역사의 끔찍한 과오는 흐릿한 칼의 얼굴을 통과해 캔버스 밖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출처: 네이버영화

어린 쿠르트에게 이모는 말했다.

“진실은 아름다운 거야. 절대 눈 돌리지마.”

감추어진 것들을 헤집고 진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혼돈의 시기를 겪을 때,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예술은 항상 우리 곁을 함께 해왔다. 인간을 사랑하는 조물주 역시 그러하다. 옳지 않음에 담대함을 구하는 용기, 선함의 영향력을 붙잡고 가는 믿음,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은 모두에게 (필자를 포함!) 2021년 한 해 평안과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한다.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