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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피플
2021-06-29

이런 사람이 천사인가보다



아무나 쉽게 해내지 못할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존경심이 든다. 특히 평생에 걸친 이타적 삶은 전해 듣기만 해도 마음을 묵직하게 만드는 울림이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 누구라도 생각할 것이다. 아마 이런 사람 이 천사가 아닐까 하고.


일제 강점기와 전쟁으로 황폐했던 대한민국의 역사, 한 세기가 흘러 눈부신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비단 역사를 대표하는 몇몇 업적만이 기여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아끼지 않고, 내어 준 이들의 뒷받침 또한 컸다. 이번 달 에덴미디어가 만난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이사장도 그중 한 사람이다.


올해로 만 나이 103세, 그의 말을 빌려 적자면 지난 한세기 그의 삶에는 크게 세 개의 산이 있었다. 먼저, 15년간 간사장으로 일한 ‘한국걸스카우트’. 그는 5, 60년대 척박했던 때에 우리 딸들이 올바르게 공부하고 배울 수 있도록 걸스카우트를 재건해 애국과 여성 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이는 역동하는 대한민국의 움직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다음은 ‘세계감리교여선교회’로 그는 세계 회장을 맡아 전 세계를 잇는 사랑의 가교 역할을 해냈다. 이후 80년대엔 국내 최초 자원봉사 교육을 시작하고 ‘각당복지재단’ 을 설립해 호스피스와 죽음 준비 교육이 자리 잡게 했다. 최근 세대를 불문하고 관심이 높은 웰다잉(well- dying) 문화가 국내에 일찌감치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1세대 ‘사회복지가’인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휘몰아치는 근대사의 폭풍우 속에도 모두를 위해 앞장서서 배를 짓고 띄우며 주체적으로 살아 온 사람. 짐작건대 그것은 세상적 가치, 개인의 욕심을 좇아온 길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한평생 그를 이끌어 온 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열의-배움과 공부의 씨앗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각당복지재단 건물은 옛 일본 관사를 개조한 것으로 김 이사장이 자택으로 사용한 지는 60 년이 넘었다. 긴 세월을 함께 했을 담쟁이 덩굴이 정원 곳곳 새순을 뻗기 시작하는 5월 무렵, 옛 건물에는 특유의 정다움이 가득했다. 집 앞에 마중 나온 그가 양손과 미소를 건넸고, 눈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따뜻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참 좋아했습니다. 강원도 강성은 제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기차와 전기가 들어온 아주 막힌 마을이었는데, 어느 날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우연히 잡지에 김활란 박사*가 나온 걸 봤어요. ‘아, 여자도 공부해서 박사하면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구나’ 깨달음이 왔죠.”

*한국인 최초의 여성 박사로, 1931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7대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다. 편집자 주.


당시 시대는 시골 소녀에게 공부의 길을 쉬이 열어주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에게는 넓은 세상으로 이어질 교회라는 문이 있었다. 교회에서 읽고 배우며 꿈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강성은 비록 작은 마을이었으나 독립 운동가와 해외 선교사들이 자주 오가는, 세상과 통할 길이 있던 곳이었다. “쉽진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 님이 도와주시더라고. 교회 전도사, 선교사님이 다리가 되어 주셨어요. 그때 감리교 선교부에서 케이트 쿠퍼Kate Cooper라는 여자 선교사가 강원 지역을 담당했어요. 우리는 그 이름을 ‘거포’ 선교사라 불렀죠. 아 주 어렸을 때, 그분을 처음 본 게 기억납니다. 눈이 파랗고 키가 날씬하고, 참 천사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아마 천사인가보다’ 생각했어요. 내가 서울 감리교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추천해준 것도 그분이었어요.” 교회 덕분에 뚫린 길도 그리 순탄하지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으로 학교가 문을 닫고, 거듭 공부의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렵사리 교토의 동지사여자대학교 어문학과에 입학한 후에도, 계속된 전쟁에 학업의 터전이 아닌 산업 전선에 동원됐다. 고생 끝에 졸업을 했지만, 졸업식도 열리지 않았고, 당장 고국에 돌아올 방법조차 요원했다.


각당복지재단과 김옥라 이사장의 자택이 있는 건물에 담쟁이 덩굴이 정답다. 앞마당에 자랑스레 걸린 태극기.


애국-나라를 위한 새싹

그렇지만 어려운 날들은 모이고 모여 김옥라 이사장을 이 나라의 씨앗으로 뿌려지게 했다. 절망할 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고, 일본에서 극적으로 귀국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는 뜨거운 목소리와 눈빛으로 꺼지지 않았던 배움의 열정을 말하면서 자신이 이끌려 온 손길이 바로 하나님의 그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종 그 시선은 앞마당 걸린 태극기에 머물렀다. 24시간 눈에 보이는 곳에 걸린 태극기가 보여주듯 애국심은 삶에 각별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 불씨로 마침내 그의 열정을 쏟아부을 걸스카우트의 시기가 열렸다.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에 태어나 일제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어요. 태극기를 마음껏 보지도, 만지 지도 못했죠. 괜히 누가 듣지도 않는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부르기도 하고요.

제가 일본에서 돌아와 군정청에서 일하던 때, 같은 건물에 한국 걸스카우트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걸스카우트 훈련 강사가 왔다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 담당자들이 소홀해서 그의 교육을 받을 사람조차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를 도우러 온 천사 같은 이에게 그런 푸대접이라니 안되겠다싶어 자원해서 통역이라도 했죠. 그렇게 6개월 일정이 덧없이 끝난 후 그는 다음 일정인 일본으로 떠났고, 우리는 한국 전쟁이 났어요.”


전쟁은 모든 일상을 빼앗았다. 어린 아들들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라 부산까지 내려 갔다. 거기서 우연히 일본어로 된 걸스카우트 지침서를 보게 됐다. 어느새 일본은 훈련을 제대로 받고 책자까지 낸 것이었다. 순간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졌다. “비록 일본의 속국이었던 시대를 살아왔지만, 이제 우리가 독립을 하지 않았는가 말이죠. 게다가, 이건 군사력, 정치력, 재정도 필요 없고 여성 지도자들이 마음을 합쳐 우리 딸들을 기르는 일인데, 이런 것까지 일본에 뒤진다는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터질 듯 해 서 통곡을 했어요. 그토록 천대를 받았는데, 왜 지금까지 이래야 하나 생각에...”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그는 걸스카우트를 일으켜 세우기로 했다. 한국에도 걸스카우트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한글로 책을 만들고, 미국에 편지도 썼다. 그러자 마법처럼 세계 곳곳에서 격려의 말과 지원금이 속속 도착했다. 한국의 움직임은 세계 속에 한 걸음 더 알려졌다. 이후 그의 삶은 줄곧 사랑을 전하는 숭고한 일의 일선에 섰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장 16절-


뜻-삶과 세상을 변화시킨 열매

수십 년 오직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걸어온 그 길에는 눈물도 참 많았다. 2018년 개정판을 발행한 그의 자서전 <나, 하나님께 이끌리어>에서 많은 순간 실제 그의 눈물을 목격하게 된다. 기쁨으로 벅차오를 때, 원통하고 슬플 때 감정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은 그였다. “감정의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눈물이 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제 일생에 그냥 기뻐서 눈물이 철철 흐른 때가 몇 번 있었고, 슬픔도 그래요.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친구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이 한계점 이하로 떨어지면 그저 눈물이 났어요. 구름이 비가 되듯이.”


이야기는 눈물에서 그의 현역인 각당복지재단으로 이어졌다. 이는 김옥라 이사장이 부군 故라익진 선생과 뜻을 모아 1986년부터 시작한 사회복지법인이다. 일찍이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박애를 전해 온 그가, 이제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을 구상한 것이다. 더 아름다운 세상, 나아가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우수한 학생들을 지원하고, 자원봉사 인력을 기르는 등 인재를 육성하는 데 뜻을 두었다. 점차 봉사 및 호스피스 교육, 웰다잉과 관련한 산하기관도 여럿 만들었다. 그 중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는 그에게 하나의 큰 변화를 주었다. 당시 부정적이던 죽음의 인식을 딛고 누구보다 앞서 죽음 준비를 마주한 것은 큰 용기였을 것이다. “글쎄요, 내게 큰 용기가 있어 미리 준비하고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들처럼 죽음이 두려운 건 저 도 똑같았어요. 그런데 1990년, 남편이 갑자기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겁니다. 불과 며칠 전에 일본에 같이 간 사람을 시신으로 모시고 와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 됐어요. 심지어 올 때는 같은 비행기에 탈 수 없어서 하나는 산 사람이 타고, 그이는 짐 싣는 차에, 그렇게 돌아왔죠. ‘죽음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이여. 우릴 이렇게 갈라놓습니까.’ 기가 막히고 막혀서 장례 치르고도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그러기를 수개월, 방에서 묵상하다가 목소리를 들었어요. ‘너도 죽고 나도 죽을 테니 죽음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공론에 붙이라.’”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그는 당장 주변부터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보자는 그의 제안에 적잖은 이 들이 기꺼이 자리를 함께했다. 어느새 소규모였던 모임은 천여 명이 참석하는 강연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죽음을 본격적인 공론으로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가 시작되었다. 그는 회장으로서 많은 이들이 죽음의 의미와 뜻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쭉 그 모임이 살아있어야 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 시간이 어느새 30년, 바람대로 그사이 많은 사람이 죽음에 관한 생각을 나누었고, 자신도 공부하며 생각이 많이 바뀌 었다. 그는 이제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게 됐다고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말씀하셨어요. 죽음은 하나의 관문을 넘는 거라고.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 그 관문을 넘어서는 읽어보지 않은 책과 같다. 읽어보지 않고는 책 속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관문을 넘는 것만 알지, 그다음은 하나님 손에 있어요.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한다고 하셨죠. 그걸 믿는 겁니다.”




이후 재단을 통해 죽음 준비 교육, 애도상담,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 등 삶의 마무리와 연결성 있는 사회 교육의 기반을 다졌다. 이번에는 그가 개인적으로 일찍이 안식처를 마련한 에덴낙원과 인연에 대해 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어느 날 글을 읽다가 에덴낙원을 알게 됐어요. 주변에 물어보니 거기 안식처를 마련해 놨다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한번 가보았더니,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맞아 아름다운 안내를 해주셨어요. 찬송이 흐르고, 기독교인들이 모여있는 편안한 크리스천 커뮤니티가 나는 참 마음에 들었어요. 달리 의논할 것도 없이 ‘아, 나는 여기에 오고 싶다.’ 생각했죠. 모든 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됐어요. 팔당에 모셨던 남편을 이장했고, 그때가 벌써 5년 전입니다. 이제 나도 세상을 떠나면 그리로 갈 거예요.” 그는 에덴낙원에 부부 안식처를 마련한 후 다른 무엇보다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김옥라 이사장과 故라익진 선생, 부부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에 굵직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다. 평생의 동반자로서 가족을, 그리고 ‘뜻’을 모아 각당복지재단을 통해 열매를 맺은 두 사람은 천국으로 향하는 삶의 마무리에서도 함께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종종 에덴낙원을 찾아 곳곳을 느끼기도 한다. 자주 보는 이들과는 종종 호텔에서 묵기도 하고 레스토랑 식사도 즐긴다.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는 안식처에 들어가기 전 기도하는 두 손을 형상화한 조각(부활소망가든) 을 꼽았다. “조각 중에 기도하는 예수님이 계시죠. 부활교회에서 밖을 내다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 12년의 혈루증이 낫잖아요. 나도 같이 가서 그 옷자락을 만지고 싶어요.”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는 앞서 죽음에 대해 말할 때처럼 묵직하고 분명했다. 우리가 모두 언젠가 닿게 될 안식 의 길이 아름다울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장장 2시간 가까이 큰일과 귀한 뜻을 펼쳐낸 긴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는 끝내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줄곧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고, 자신은 이끌려 왔을 뿐이라 공을 돌렸다. 공부로 시작된 열정은 한 세기를 지나며 싹과 열매로, 하나님의 뜻을 품은 씨앗으로 퍼졌다. 그 삶은 이미 수많은 이들에게 천사의 존재를 보게했을 것이다. 그 옛날 소녀에게 빛과 같았던 푸른 눈의 선교사처럼.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늘 나를 이끄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비고비마다 천사가 나한테 나타난 걸 느껴요. 그래서 말하자면 어떤 삶이든 하나님께 이끌려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이끌려 103세까지.” 




김 옥 라  각당복지재단 명예이사장


한국에 대한소녀단 걸스카우트 창단을 주도하고,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를 설립하여 ‘자원봉사’ 개념을 뿌리내리게 한 여성운동가. 국내 최초의 웰다잉 운동을 일으킨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열었으며,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 세계회장을 역임했다. 100세를 넘긴 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각당복지재단 명예이사장을 비롯한 활동을 지속하며 1세기가 넘는 평생에 걸쳐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았다.

황은비 에덴미디어 편집장 대행

에디터, 기자, 에세이스트. 언론을 전공하고 매거진, 일간지 등 매체에서 일했다. 현재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오가며 기억될 콘텐츠를 고민하고 만든다. 2021년 에덴미디어 편집장 대행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