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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미디어

컬처
2021-06-09

시스템과 실존의 문제를 쓸어안은 이상한 나라의 소극, 영화 <더 랍스터>



삶은 한없이 지루하다가도 어느 순간 비현실의 경계로 치닫곤 한다. 일상에 휩쓸려 자각하기 힘든 이러한 면면을 영화는 집중력 있게 바라볼 기회를 준다. 6월의 에덴미디어는 심연에 가라 앉은 인간의 뚜렷한 욕망을 마주하게 할 영화 리뷰를 준비했다.


란티모스와의 첫 만남, 그 해 여름은 서늘했네.

한창 예술영화 ‘필’에 충만한, 그리고 진심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친구들과 나는 시간이 나면 버릇처럼 종로근처의 아트시네마로 몰려갔다. 그 당시 영화의 신이 반짝 강림했던 건지 뭔지 그렇게나 예술영화극장을 찾아다니곤 했다. 어느 여름날이었나, 그 날도 버릇처럼 영화를 보러갔다. 상영일정표에서 <송곳니>라는 영화명을 확인하고는 ‘참 신기한 제목이네’ 생각했던 어렴풋한 기억도 있다. 영화 내용은 간단하다. 아버지의 규칙에 길들여져 집안에서만 살고 있는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대문 밖 바깥 세상을 꿈꾸고, 그중에 한 아이만이 그곳을 탈출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크게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어이없고 황당하며 헛웃음으로 무장한 영화가, 시스템의 문제와 세계의 문제 그리고 그 너머의 ‘이상’에 대한 철학적 사유까지 품고 있다니. 복잡한 마음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놀란 표정을, 하지만 허탈함 또한 애써 감추던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감독, 누구야? 이 영화 정체가 뭐야!”

이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영화 <더랍스터>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기이하지만, 날선 이야기들

나중에서야 이 영화의 감독이 기이한 발상으로 한창 주목받는 그리스의 신예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것과, 2009년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부분 대상 수상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그의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면 제일먼저 극장으로 달려가는, 대놓고 ‘팬’임을 자처하는 열혈관객이 되었다. 란티모스는 <송곳니> 이후 <알프스>, <더 랍스터>, <킬링디어>에 이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로 그만의 우화적인 세계를 완성해가고 있는듯하다. 위 작품들의 교집합을 생각해본다면 란티모스의 세계는 시스템 너머 유토피아에 매혹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 혹은 그들 간의 관계맺음의 방식에 대한 탐구로 가득 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감독은 <송곳니>에서 어떠한 사회적 문명도 거부된 채 아버지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가 스스로 송곳니를 부러뜨리고 세상으로 뛰쳐나가는 주인공을, 다음 작 <알프스>에서는 구성원의 상실을 경험한 가족들과 그 빈자리에 들어와 '가족 코스프레'를 담당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관찰한다. <더 랍스터>에서는 그 탐구 범위가 한층 넓어지며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억압된 상황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인간의 심리와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어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에서 <더 랍스터>가 출발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결국 이런 감독의 의문은 기묘한 분위기와 낯선 소재를 입고,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감정적 거리 두기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정상 normal'으로 규정된 것들을 냉소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는 기묘함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더 랍스터>: 두 개의 세계

<더 랍스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짝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어떤 미래사회. 짝이 없는 이들은 짝을 만들기 위해 커플 메이킹 호텔에 머물며 커플 교육을 받는다. 정해진 기한 내에 짝을 만나지 못하면 동물이 되기 때문이다. 노력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이비드(콜린 파렐)는 숲으로 도망치고, 그 숲에서 만난 솔로들의 모임에 합류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솔로 모임의 멤버 중 한 명인 근시 여인(레이첼 와이즈)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전체적인 틀은 극단적이고 건조하지만 그 안의 설정은 황당무계하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장르영화의 표현방식과 그 결이 너무 달라 오히려 거대한 실험극인가 싶을 정도이다. 때론 어처구니없는 웃음도 자아낸다. 남녀 메이드가 커플의 유용성을 시뮬레이션 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 코미디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진지함에 있다. 지금 그들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다.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모두 심각 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는 크게 두 세계가 존재한다. 커플이어야 하는 호텔, 그리고 솔로여야만 하는 숲 속. 호텔은 오로지 '커플 됨'이라는 목적의식만 가득한 규범과 통제의 시스템이다. 본질적인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인간을 커플 됨의 형식적 요소에 끼워 맞추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라고 할까. 이런 ‘끼워 맞추기’는 다양한 상황으로 묘사된다. 시스템 운영상의 편리를 위해 데이비드는 자신의 발 사이즈인 44반 사이즈가 아닌 44나 45의 신발을 선택해야 하고, 12년 정도로 기억하는 전부인과의 기억도 정확히 11년 1개월이라는 데이터로 남겨야 한다. 게다가 45일 이라는 물리적 시간 내에 커플이 되어야 한다. 결국 호텔은 사랑 없는 인간관계의 처절함과, 거대한 시스템 앞에 한없이 무력해진 인간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담은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숲은 살아남기 위해 거짓사랑과 위선을 행할 바에 차라리 고독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숲 역시 호텔과 다르지 않은 것이, 무조건적으로 솔로여야만 한다는 또 하나의 거대한 통제 시스템을 앞세운 곳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자율성과 감정 자체를 통제하는 두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판단과 선택권을 잃어가는 인물들을 보여주는데 이에 맞서려는 듯, 사랑을 앞세운 데이비드와 근시 여인은 다시 한 번 이 거대한 시스템을 탈출하기로 한다.



영화는 결말에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삶에 대한 욕망. 인간 본성에 던지는 씁쓸한 웃음

이 영화가 충격적인 이유는 결말에 있다. <더 랍스터>는 결코 사랑의 진정성에 낙관적인 영화가 아니다. 멜로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핵심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죽음, 바꿔 말하면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 일 것이다. 나는 시종일관 호텔과 숲을 탈출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이 시스템의 속박을 뛰어넘어 진정한 사랑을 찾고자 하는 행위라기보다, 계속해서 죽음의 공포를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처럼 보였다. 영화는 사랑하는 여인이 장님이 된 후 그가 느끼는 두려움을 조금씩 암시하는데, 이는 데이비드를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가 아닌 다가오는 죽음의 위험 앞에 두려워 떠는 유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뒤집어버린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 어둠으로 끝을 맺는 엔딩 장면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사랑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이렇게나 처참히 무너지는 것일까. 물론 감독은 그것이 정답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극 중 데이비드가 던진 몇 마디 대사를 떠올린다면 감독의 냉담한 시선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밖에 없다. 데이비드가 호텔에 머무를 당시 호텔 관계자가 ‘만약 커플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동물로 살고 싶은가?’ 라고 묻는 질문에 데이비드는 ‘100년까지 살고, 100살까지 번식이 가능하며, 귀족처럼 푸른 피를 가지고 있는 랍스터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오래 살고 싶고, 끊임없이 사랑하고 싶으며, 자신의 존재에 자긍심을 가지고 살고 싶다’

이처럼 인간의 본연의 욕망에 대한 솔직한 은유가 또 있을까.

장다나 영화 칼럼니스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CJ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와 복합문화공간 다락스페이스의 프로그래머 역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외래교수,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